취임 1년을 맞은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이 연이은 '광폭행보'로 주목받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거물급 외국인 최고경영자(CEO)를 대거 영입한 데 이어 최근에는 글로벌 유력 기업과 합작사를 잇달아 세우며 미래 시장 선점에 나서는 등 공격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현대차 52년 역사에서 지난 1년이 가장 격변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호칭 파괴·서열 파괴·절차 파괴
정의선 수석부회장은 지난해 9월 14일 취임했다. 취임 이후 가장 큰 변화는 내부에서 시작됐다. 이른바 ‘1세대 경영진’의 퇴진이다.
지난해말 인사에서 그룹의 주축 역할을 하던 전문 경영인 부회장 5명 중 4명을 교체하며, 젊고 역동적인 조직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나이 든 경영진을 상당수 물러나게 하고 50대 중후반 및 60대 초반 사장들을 전면 배치하는 세대교체를 진행해 61.1세였던 사장 이상 임원 평균 연령은 57.9세로 낮아졌다.
인사 '순혈주의'도 타파했다. 출신과 관계없이 실력 위주로 인재를 영입하고 있다.
그룹을 주도하는 외국인 사장도 늘었다. 알버트 비어만 차량성능담당 사장이 연구개발본부장으로 임명되면서 첫 외국인 연구개발(R&D) 총괄이 됐다. 경쟁사인 닛산의 호세 무뇨스 최고성과책임자(CPO)를 글로벌 최고운영책임자(COO)로 영입하기도 했다.조직 문화에도 변화를 줬다. 수평적 직급 체계를 도입해 임직원의 긍정적 변화를 끌어냈다. 기존 사원에서 부장까지 5단계 직급 체계를 매니저, 책임 매니저 2단계로 축소했다. 임원 직급 체계도 상무, 전무로 줄였다.
소통 체계도 달라졌다. 임직원은 회사에 대한 건의 사항을 모바일 메신저로 주고 받으며 소통한다. 한여름에도 정장을 입던 임직원이 청바지에 반소매 티셔츠를 입고 출근하는 모습도 자연스럽다. 올해부터는 국내 10대 그룹 가운데 처음으로 정기 공채를 완전히 없애고 수시 채용을 도입했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회사 조직문화가 급속도로 빠르게 변해가는 것이 체감될 정도"라며 "유연한 기업 문화 도입과 빠른 의사결정 등의 측면에서 직원들은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자율주행 통 큰 베팅…수소전기차도 키운다
정의선 수석부회장은 조직 혁신과 함께 미래차 개발을 위한 투자도 아끼지 않고 있다. 지난달 23일 자율주행 시장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앱티브(APTIV)와 합작사를 세웠다. 앱티브는 세계 3위권의 자율주행 기술력을 보유한 회사다.
글로벌 완성차 업체와 세계 최고 수준의 자율주행 기업이 별도의 합작법인을 세워 자율주행 기술을 연구하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사업 모델로 꼽힌다.
현대차그룹과 앱티브가 각각 절반의 지분을 갖는다. 현대차그룹은 20억 달러(약 2조3900억원)와 함께 차량 제작 기술, 주행보조시스템 기술 등을 제공하며 앱티브는 자율주행 기술과 지적재산권, 700여 명에 달하는 자율주행 솔루션 개발 인력을 출자한다.
정 수석부회장은 합작사 설립에 대해 "합작사를 세워야 다른 자동차 회사에도 공급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기술을 선점해 이후 다른 업체에도 공급하겠다는 것이다.
세계 최상위권의 기술을 확보한 수소전기차 부문에서도 시장 선점을 위해 스위스 수소기업인 H2 에너지(H2E)와 합작사 '현대 하이드로젠 모빌리티'를 세웠다. 2025년까지 총 1600대의 수소전기 트럭을 스위스에 공급한다. 이후 독일과 네덜란드 등 다른 국가로 확대할 계획이다.
정 수석부회장은 미래차 산업의 한 축인 모빌리티 혁신 사업에 대해서도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다. 경영의 키를 쥐기 시작한 지난해부터 올해 9월까지 그룹 주요 모빌리티 플랫폼 투자액을 합산하면 7520억원에 이른다.대표적인 투자처는 동남아시아 최대 승차공유(카헤일링) 플랫폼인 싱가포르 '그랩'에 대한 2억7500만달러(약 3283억원) 투자와 인도 1위 모빌리티 기업 '올라'에 대한 3억달러 규모 전략 투자다. 그랩과 올라를 필두로 현대차그룹은 전 세계 곳곳에서 모빌리티 플랫폼과 협업하고 있다. 대개 지분을 투자하고 해당 플랫폼에 현대·기아자동차 완성차를 공급하는 구조다.
이외에 정 수석부회장은 다수의 국내 모빌리티 플랫폼에도 투자하며 생태계를 키우고 있다. 지난해 7월 라스트마일 모빌리티 플랫폼 '메쉬코리아'에 225억원을 투자한 데 이어 최근 마카롱택시 서비스를 운영하는 KST모빌리티에 50억원, 네이버 출신 송창현 대표가 이끄는 모빌리티 스타트업 '코드42'에 20억원을 각각 투자했다.
정의선 체제 1년이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앞으로 풀어야 할 난제도 있다. 무엇보다 중국·인도 등에서 실적회복이 급선무다. 여기에 지배구조 개선 작업도 미완으로 남아 있다.
재계 관계자는 “정의선 부회장은 기아차 사장 시절부터 경영 능력을 충분히 검증 받았고, 현대차 부회장, 그룹 총괄 수석부회장을 거치면서도 계속해서 성공적인 모습을 보여 왔다”면서도 “보다 안정적으로 그룹을 이끌기 위해서는 지배구조 개편이 마무리되고 경영승계가 보장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