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우희가 현대사회 속 여성들의 자화상을 그린다. 천우희가 표현해낸 불안과 좌절에 숨이 턱턱 막힐 정도다. 영화 '버티고'다.
11일 오후 서울 용산CGV아이파크몰에서 영화 '버티고' 언론시사 및 기자간담회가 진행됐다. '버티고'는 현기증 나는 일상, 고층빌딩 사무실에서 위태롭게 버티던 서영(천우희)이 창 밖의 로프공과 마주하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다. '삼거리 극장' '러브픽션' 전계수 감독의 신작이다. 천우희를 비롯해 유태오, 정재광 등이 출연한다.
최근까지도 '멜로가 체질'에서 밝은 모습으로 능청스러운 로맨틱 코미디 장르를 소화했던 천우희. 이번에는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버티고'를 작년 이맘때쯤 찍었다. '멜로가 체질'에서도 30대에 도달한 여성을 연기했다"는 그는 "제 또래이기 때문에 더 가깝게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두 작품 다 판타지가 있고 극적인 면이 있지만, 조금 더 현실에서 느꼈던 감정을 공감할 수 있게 표현하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이어 "극한 감정들을 쌓아가다보니 그런 것들을 현장에서 최대한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서영이 처해 있는 감정선을 연결하는데 집중하려고 노력했다"고 덧붙였다.
그간 여러 작품에서 강렬한 연기를 보여줬던 천우희지만 이번에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최근작인 '우상' 속 천우희를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180도 달라진 연기 결에 놀랄 정도.
이에 대해 "서영의 이야기지만 관계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관계들이 선을 하나씩 연결해놓은 것 같았다. 그 줄이 하나씩 툭툭 끊기면서 서영이라는 인물이 낙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아무런 줄이 연결돼 있지 않은 이에게 위로를 받는다"면서 "지금까지는 에너지를 발산하는 캐릭터를 연기했는데, 이번에는 안쪽으로 에너지를 응축해야했다. 큰 수족관에 갇혀있는 돌고래 같은 느낌을 받았다. 고립돼 있고 불안한 느낌을 갖고 있었다. 감독님이 설계한 감각적인 설정을 현실적으로 구현할지 고민했다"고 설명했다.
전계수 감독은 천우희에게 현대 여성의 자화상을 담는다. 실제 직장 생활을 겪어봤던 그이기에 더욱 현실적인 그림이 나올 수 있었다고.
전 감독은 "직장 생활을 3년 정도 했는데, 그때의 감정과 경험으로 시나리오를 썼다. 주인공을 남성으로 설정했을 경우 객관성을 잃을 것 같은 우려가 들었다. 여주인공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선 자체가 섬세했으면 했다. 저는 제 마음을 잘 아니까, 같은 나이를 지나는 젊은 직장인의, 특히 여성의 마음의 무늬가 어떨까 궁금했다. 여성으로 설정해야만 조금 더 보편적이고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캐릭터들은 실제 직장 생활할 때 겪었던 이들에게서 모티브를 가져 왔다"며 고층 빌딩 속 여성 회사원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이유를 설명했다.
이어 "의외의 곳에서 위로받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을 때 삶을 지속시키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했다. 서영 같은 경우, 다시 인간 관계의 회복이다, 살아가는데 있어 필요한 것은 인간관계의 회복이라고 여겼다"며 이 영화의 메시지를 이야기했다.
'버티고'는 분명한 서사가 있는 영화는 아니다. 잔잔한 일상 속에서 서영의 감정을 따라간다. 별 사건이 없음에도 이렇게나 처절하고 고독한 이유는 실제 우리의 일상이 그러하기 때문일 터다.
이같은 독특한 진행 방식에 대해 전 감독은 "일반적인 영화들처럼 서사의 단단함에 기대는 작품은 아니다. 이 영화를 설명하는 여러 표현이 있겠지만, 감각을 상실한 현대인이 감각을 회복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감각을 외면했을 때 감정의 무늬들을 어떻게 하면 사운드와 미장센에 담을까 신경썼다. 이 영화의 동력은 서사라기보다는 서영이라는 인물의 감정의 흐름이다.서영이 발 딛고 있는 지반 자체가 흔들리고, 세계 자체가 왜곡돼 들려오는 감각과 감정의 리듬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 이런 시도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특히 이 영화는 주로 남성에게 악역을, 여성인 서영에게 피해자 역할을 맡긴다. "여성과 남성의 대립을 굳이 일부러 그린 것은 아니다. 문명의 속도를 따라가는 현대인의 지치고 피곤한 모습,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좌절감에 관심이 있었다"는 전 감독은 "고층 건물은 남성적인, 수직적인 프레임이다. 높고 외부와 단절돼 있다. 회사 내 질서도 가부장적이다. 그 안에서 계약직이라는 신분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며 살아가는 여성, 사방이 포위된 것 같은 느낌이 남성성과 대비를 이룰 때 조금 더 극적으로 드러나지 않겠냐는 무의식이 있었던 것 같다. 주체적인 여성이 여러 작품에 나오긴 하지만, 저는 여전히 21세기 초 한국사회를 여전히 여성이 불평등한 사회이고 이 안에서 겪는 고통을 그대로 들여다보는 시선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