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개라도 모자른 몸을 기어이 열 개로 만들어내는 이성민(53)이다. 2020년 연초부터 두 편의 영화와 한 편의 드라마로 스크린과 브라운관 동시 점령에 나선 이성민은 계획이 다 있었다는 듯, 전혀 다른 장르에서 전혀 다른 분위기의 캐릭터로 '같은 얼굴 다른 느낌'의 신선함을 완성했다.
특히 설 연휴 관객들과 만나고 있는 '남산의 부장들'과 '미스터 주: 사라진 VIP'의 동시기 경쟁은, 지난 2018년 여름시장 '공작'과 '목격자'를 나란히 내놨던 모양새와 꽤 닮았다. 이번엔 한 날 한 시 개봉으로 눈치싸움은 더욱 치열해졌지만 개봉과 동시에 빵 터진 '남산의 부장들'과 실관람객들의 호평을 자아내고 있는 '미스터 주: 사라진 VIP'는 배우 이성민의 진가를 여실히 확인케 한다.
결과를 떠나 배우의 선택에는 늘 이유가 있다. '남산의 부장들' 박통과 '미스터 주: 사라진 VIP'의 주태주는 이성민에게 '한번쯤 도전해 보고 싶은 캐릭터'로 다가왔다. 준비 과정부터 연기 패턴까지 모든 것이 달랐지만 그래서 즐겁고 의미있었던 시간. 이성민은 "어느 한 작품만 홍보하기에는 조금 미안한 상황이 됐다. 설 연휴기간 무대인사도 두 영화 모두 뛸 계획이다"고 전해 남다른 애정을 엿보이게 했다.
2018년과 2019년 '공작(윤종빈 감독)'을 통해 역대급 호평은 물론, 굵직한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휩쓸며 배우 인생 최고의 순간을 만끽했던 이성민은 "그저 상상만 했던, 너무 먼 이야기라 감히 꿈이라 말할 수도 없었던 일들을 모두 이뤄낸 시간이었다. '미생'에서 했던 말처럼 더할나위 없었다"며 "인연의 소중함을 느꼈고, 그 이상의 책임감을 갖게 됐다. 만약 다시 태어나면 절대 이건 안 할테지만, 연기 하나밖에 모르고 살아 온 이번 생에서는 이왕 이렇게 된 것 후회없이 다 쏟아붓고 싶다"는 진심을 고백했다. 꾸준한 인내 만큼이나 겸손의 미덕이 돋보이는 배우. 매 인터뷰마다 힐링의 시간을 선물해 주는 이성민을 모두가 애정하고 응원하는 이유다.
-'미스터 주: 사라진 VIP'와 '남산의 부장들'이 같은 날 개봉했다. "날짜까지 같았던 적은 처음이다. 피하고 싶었지만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에…. 아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한데, 한편으로는 여러 번 얻어 맞는 것 한 번만 맞게 되는 것 같아서 속은 후련하다. 하하. 어쩌다보니 드라마('머니게임')까지 같이 겹쳤다. 다 잘 됐으면 좋겠다."
-다행히 장르는 극과 극이다. "많이 다르다. 소재, 스토리, 캐릭터 모두 다르다. 그래서 영화를 찾아주는 주요 관객층도 다를 것 같다. '미스터 주'는 12세 관람가니까 아이들이 쉽고 편하게 볼 수 있는 영화다. '남산의 부장들'은 시사회 때도 연세있는 분들이 눈에 띄더라.재미있게 보신 것 같았다. 다시 정서를 조금 더 알고 이해하시지 않을까 싶다."
-설 연휴는 무대인사와 함께 하게 될까. "하루는 '남산의 부장들' 갔다가, 하루는 '미스터 주' 갔다가 그렇게 될 것 같다. 어떤 하나만 선택하기가 힘들다. 할 수 있는대로 아주 다 할 생각이다.(웃음)"
-'미스터 주: 사라진 VIP'는 왜 출연을 결정했나.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작업이 될 것 같았다. 외국 영화들로는 많이 접해 본 작품이라 익숙해 보일 수 있지만 한국 영화에서는 잘 못 봤다. 작품이 없으니 출연할 수 있는 기회도 많지 않다. 기회가 왔을 때 해보고 싶었다. '로봇 소리'도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가족들이 다 함께 볼 수 있는 영화를 좋아한다. 그래서 더 끌렸던 것 같기도 하다."
-반면 '남산의 부장들'은. "'마약왕'을 찍을 때 우민호 감독님이 갑자기 이야기를 하셨다. 혹 하더라.(웃음) 그 역할(극중 박통으로 설명되는 박정희 대통령) 또한 '지금 안하면 언제 또 할 수 있을까' 싶어 덥석 물었다. 그리고 나서 한참을 걱정했다. 역대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대부분 비슷한 얼굴을 가진 분들이 그 캐릭터를 연기했는데, 나는 하나하나 만들어 가야 했다. 외형부터 동작, 제스처, 걸음걸이까지 다 만들었다. 힘들었지만 재미있는 작업이었다."
-참고한 영상이 많았을 것 같다. "맞다. 배우로서 실존 인물을 연기하는게 처음이었다. '내 식'이 아니라 '그 사람화' 되어야 했다. 그런 작업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영화 속 캐릭터는 온전히 캐릭터다. 내 모습은 없다. 비슷하게 보였다면 다행이다."
-코미디 영화가 꾸준히 부흥하고 있다. "사실 '미스터 주: 사라진 VIP'는 애초 코미디 영화로 만든 작품이 아니다. 그냥 가족 영화? '휴먼'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영화라 생각했다. 경쾌하게 다루긴 하지만 코미디를 노렸다면 감독님도 애초 시나리오를 저렇게 쓰지도, 연출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관객들을 웃겨야 했다면 알리(극중 개)가 욕을 하고 다녔겠지. 하하. 똥 밟는 신을 연기하면서 제대로 파악했다. '아, 이 영화 아이들 보는 영화구나' 똥 개그는 언제 어디서든 애들이 정말 좋아한다."
-'남산의 부장들'은 정치색이 강한 영화로 비춰질 수 있는데, 부담감은 없었나. "어차피 한 시대를 이야기하는 영화니까 그렇게 보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영화가 뛰어 넘어야 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정치영화가 아니라 욕망에 대한 영화다. 불안정하게 쌓아올린 모래성 위에 있는 권력자들의 불안함이 '남산의 부장들'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다. 어쩔 수 없이 정치적 스토리가 나올 땐 카메라가 뒤로 빠지는 등 감독님도 직접적 인물 촬영을 피하려고 하셨다. 계엄령 선포 때 뒤통수를 찍는게 같은 맥락이다."
-그 시대를 직접적으로 경험한 관객들에게는 익숙한 만큼 새롭게 느껴질 것 같기도 하다. "맞다. 그 시대의 정서, 공기, 분위기를 알고 계시는 분들이 훨씬 더 체감을 할 것이고, 박통 캐릭터 역시 그 인물이 어땠는지 젊은 세대보다 정서적인 이해가 높을 것이다. 젊은 분들에겐 약간 좀 낯설 수도 있겠지만 조직 사회로 이해하면 편하지 않을까. (이)희준이 캐릭터 같은 경우는 직장 상사라기보다 신앙에 가깝게 대하긴 하지만.(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