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삼성 신인 류중일은 입단 첫해부터 주전 유격수로 뛰었다. 그해 유격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며 '명 유격수'의 계보를 알렸다. 경북고에 재학 중이던 1982년 우수고교초청대회에서 '잠실구장 개장 1호 홈런의 주인공'이라는 특별한 기록도 남겼지만, 프로 입단 초반 1군에서 방망이는 영 신통치 않았다. 당시 삼성에 몸담고 있던 천보성 코치가 '신인' 류중일에게 "수비만 잘하면 된다"고 부담을 덜어줬다. 류중일은 그해 타율 0.287로 성공적인 데뷔 시즌을 보냈다.
33년이 흘러 류중일(57) LG 감독은 오지환(30)을 떠올렸다. 자신과 같은 유격수 포지션에서 활약하는 오지환이 시즌 초반 극심한 타격 슬럼프에 빠져 있어서다.
류 감독은 최근 코칭스태프와 점심을 먹는 동안에 오지환에게 전해달라며 메시지를 주문했다. 23년 전 자신이 코칭스태프에게 들은 조언과 마찬가지로 "수비만 잘하면 된다"는 얘기였다.
오지환은 개막 3주차까지 타율이 0.175에 그쳤다. 규정타석을 채운 60명 중 58위. LG는 이천웅-김현수로 구성된 테이블세터진과 로베르토 라모스를 필두로 한 중심타선이 초반 뜨거운 공격력을 자랑했지만, 오지환이 포진한 하위 타선에는 아쉬움이 컸다.
수비력은 이미 인정받았다. 수비 범위가 넓고 어깨가 강하다. 26일 대전 한화전에서 감탄을 자아내는 호수비도 선보였다. 2-0으로 앞선 6회 1사 후 한화 정은원의 타구를 역동작으로 슬라이딩 캐치해 1루로 던져 아웃 처리했다. 정은원이 좌타자로 빠른 발을 갖췄음을 고려하면 내야 안타 혹은 좌중간으로 빠져나가는 타구가 될 가능성이 높았지만, 오지환이 안타를 삭제한 것이다.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메이저리그급 호수비이자, 자신의 존재 가치를 보여준 장면이었다.
누구보다 마운드에 서 있던 선발투수 타일러 윌슨이 가장 놀라운 표정으로 고마워했다. 윌슨은 "내가 KBO 리그에서 본 야수 중 수비가 가장 훌륭하다"고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1987년 '신인 류중일'과 2020년 '프로 12년 차 오지환'을 비교하면 프로 경력에 큰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타격에서의 기대치가 다를 수밖에 없다. 오지환은 이번 겨울 LG와 4년 총 40억 원에 FA(프리에이전트) 계약을 맺어 더욱 그렇다. 또한 국내에서 가장 큰 잠실구장을 홈으로 사용하면서 개인 통산 100홈런을 돌파한 장타력을 갖춘 유격수로 기대하는 바가 크다. 오지환이 타격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였으면 하는 이유다.
그래서 류중일 감독으로선 오지환에게 부담감을 줄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수비 기본에 충실하면서 타격 페이스까지 올라왔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류 감독은 경기 전 오지환을 언급하며 "방망이가 잘 맞으면 수비도 잘 된다. 그런데 타격이 마음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수비에도 지장이 가기 마련이다"고 했는데, 다행히도 오지환은 이를 비껴갔다. 타격은 부진해도 수비에서만큼은 탄탄함을 보여왔다.
슬럼프에 빠져있던 오지환의 방망이가 이제 깨어나기 시작했다. 27일 한화전 한 경기에서 두 개의 홈런을 쏘아 올렸다. 2016년 9월 9일 두산전 이후 991일 만에 멀티 홈런을 기록했다. 더불어 이날 이번 시즌 개인 한 경기 최다인 3안타·3타점 경기를 펼쳐 2할대 타율(0.210)에 진입했다. 최근 4경기 연속 안타로 타격 페이스를 끌어올린 모습이다.
류중일 감독은 27일 한화에 15-4로 크게 이긴 뒤 "그동안 타석에서 조금 아쉬웠던 오지환과 유강남이 좋은 타구를 만들어 고무적이다"고 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