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택임대차보호법인 ‘임대차 3법’ 시행을 둘러싸고 부동산에 전세가 사라질 것이라는 ‘전세 소멸론’이 고개를 들었다. 그동안 전세보증금 대출을 주요 수익원으로 삼았던 은행은 바짝 긴장하는 모습이다. 전세가 없어질 경우 월세 대출이 생기는 것 아니냐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
임대차 3법이란 전·월세 신고제, 전·월세 상한제, 계약갱신 청구권제를 말한다. 이 제도에 담겨 있는 세입자의 권한을 강화하겠다는 정부의 의지에 따라 전셋값 상승과 더불어 전세의 월세 전환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되고 있다.
이례적 전세 대출 급증…월세 선호 탓
지난달 전국 전셋값이 역대 최고치로 치솟았다. 한국은행은 저금리가 지속되고 있는 탓에 월세를 선호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전셋값 오름세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여기에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도 영향도 있다는 분석이다.
10일 금융업계에 따르면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 등 5대 은행에 따르면 이들 은행의 7월말 기준 전세자금대출 잔액은 총 94조556억원으로 집계됐다.
전달보다 2조201억원(2.2%) 늘어났으며, 지난해 말 잔액에 비하면 13조6024억원(16.9%)이 증가한 금액이다.
이들 은행의 전세자금대출 전월 대비 증가 폭은 올해 2월 2조7034억으로 관련 집계가 시작된 2016년 이후 가장 컸다. 이후 3월 2조2051억원과 4월 2조135억원으로 연달아 2조 원대를 기록한 이후 5월 1조4615억원, 6월 1조7363억원으로 감소세를 보였지만 지난달 다시 2조 원대로 올라섰다.
7월 급증세는 다소 이례적이라는 분석이다. 통상 7월이 장마, 휴가 등으로 이사 수요가 적은 임대차 시장 비수기이고, 특히 전세 거래가 많지 않았다는 점에서다.
실제로 서울부동산정보광장에 따르면 지난달 서울 아파트 전세 거래량은 6304건으로 통계 작성을 시작한 2011년 이후 9년 만에 처음 6000건대로 내려앉았다. 올해 최다를 기록했던 지난 2월(1만3661건)과 비교하면 46% 수준에 불과하다.
더불어 집주인들이 전셋값을 올려 받는 것도 전세대출 급증의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한국감정원의 ‘2020년 8월 1주 주간 아파트 가격 동향’에서는 서울의 아파트 전셋값 상승률이 0.17%로 지난주(0.14%) 대비 0.03%포인트 확대됐다. 저금리 기조 등으로 전세매물 부족현상이 지속되는 가운데 임대차 3법까지 시행돼 상승 폭이 확대되고 있다.
이런 추세가 이어지고는 있지만, 전세가 아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서울의 한 부동산중개사는 “충분한 목돈 없이 갭투자를 한 임대인이 월세로 돌리기가 쉽지 않다”며 “이런 임대인들은 전셋값을 올릴 수 있어 전세를 선호할 수 있다”고 말했다.
줄어드는 전세…은행들, 결국 월세 대출 팔까 임대차 3법 시행을 계기로 다시 한번 한국만의 특수한 거주 방식인 ‘전세’가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에 따라 은행권은 전세 시장의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은행 입장에서 전세 거래 감소는 은행의 수익원 중 하나인 ‘전세 대출 영업’과 직결돼 있다. 정부의 고강도 부동산 규제로 인해 주택담보대출 영업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전세 대출은 최근 꾸준히 증가하며 은행에 안정적인 이자이익을 가져다주고 있다.
일부에서는 임대차 3법 시행이 당장 전세 대출 영업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을 것으로 예상한다. 장기간 이어져 온 저금리 기조로 인해 전세보다 월세가 강화되는 추세는 이전부터 나타났고, 전셋값 자체가 상승하고 있기 때문에 대출 수요는 계속 증가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특히 갭투자를 하는 다수의 임대인이 월세 전환을 위해 임차인에게 돌려줘야 하는 전세보증금을 단기간에 마련하기 쉽지 않다는 게 큰 요인이다.
예를 들어 10억원의 전세를 월세로 돌리는 경우, 보증금 2억원에 월세 150만원 정도가 되는데 이를 위해서는 8억원의 자금이 필요하다. 주택담보대출도 제한된 상황에서 8억원에 달하는 자금을 구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도 장기적으로 봤을 때, 월세 대출 상품 개발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우리나라의 ‘월세 선호’는 8년 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것으로, 특이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 심상정 정의당 의원은 페이스북에 “전·월세 비중은 2012년에 이미 역전됐다”고 했다. 국토교통부가 지난 6월 1일 발표한 ‘2019년도 주거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2008년 임차 가구 중 전세 비율은 55.0%, 월세 비율은 45.0%로 당시만 해도 전세 비중이 더 높았다. 2010년에는 전세 비율이 50.3%, 월세 비율이 49.7%로 비슷해졌다.
2012년에는 전세 비율이 49.5%, 월세 비율이 50.5%로 관계가 역전되며, 월세가 전세보다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가장 최근 자료인 2019년 통계는 월세가 60.3%, 전세가 39.7%로 조사됐다.
이에 따라 ‘공적 월세 대출’이 참고 모델로 떠오르고 있다. 현재 주택금융공사와 주택도시기금이 취급하는 월세 대출 상품이다.
이는 사회초년생, 취업준비생, 일정 소득 이하 부부 등을 대상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주택도시기금의 ‘청년 전용 보증부월세대출’의 경우에는 임차인에게 보증금·월세금을 묶음으로 빌려주는데, 월세 대출 한도는 월세를 계약 기간(24개월)으로 환산한 금액으로 잡는다. 수탁은행은 매달 집주인에게 월세를 대신 입금하게 되는 식이다.
비슷한 방식으로 은행들은 상품을 자체적으로 개발하되, 임차인에게 직접 월세를 입금해주는 방식은 그대로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 또 보증금과 계약 기간 총 월세를 합산해 ‘대출한도’를 정한 뒤, 일부를 보증기관(주택금융공사·주택도시보증공사)의 보증서를 담보로 잡고 나머지는 개인의 신용에 기반을 둘 것으로 보인다.
은행 관계자는 “당국의 방향 설정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은행 입장에서는 시도해 볼 만한 상품이긴 하다. 반전세 형태나 고액월세 매물이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라며 “건전성 측면에서도 전세 대출과 다르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