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내 최대 완성차 업체인 현대자동차가 중고차 매매사업 진출을 공식화했다. 업계에서는 현대차가 새 차 팔면 되지 헌차 거래까지 하려고 하느냐며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현대차의 의지는 확고하다. 여기에는 중고차 시장이 엄청나게 커졌다는 이유 말고도 정의선 현대차 수석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문제도 얽혀있다는 것이 업계의 분석이다.
12일 업계에 따르면 미국과 독일 등 선진국의 중고차 시장 규모가 신차보다 2배 정도 크다. 세계 최대 자동차 시장으로 꼽히는 중국 역시 올해 중고차 시장 규모가 신차를 넘어섰다는 평가다. 여기에 국내 중고차 매매시장 규모도 30조원으로 커진 상황이라 현대차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다.
김동욱 현대차 전무는 지난 8일 국정감사에서 “중고차 구입 고객 중 70~80%가 거래 관행이나 품질 평가 등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 소비자 보호 차원에서 완성차가 반드시 중고차 사업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부에서 현대차가 중고차 시장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로 경영권 승계와 결부한다.
현대차가 중고차 매매사업을 시작한다면 중고차 경매 사업 등을 맡은 현대글로비스가 할 가능성이 있다. 현대글로비스는 지난해 이미 창지우그룹과 중국 중고차 시장 진출을 위해 합자회사를 설립한 뒤 세부 내용을 논의하고 있기도 하다.
현대글로비스의 1대 주주는 정의선 현대차 수석부회장으로, 23.29%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이어 정몽구 현대차 회장 6.71%, 현대차 4.88%, 현대차 정몽구 재단 4.46% 등이 주요 대주주다.
현대차그룹의 주요 계열사 중 오너가의 지분이 가장 많은 곳이 바로 현대글로비스다. 노르웨이 해운사 빌헬름센의 자회사인 덴 노르스케 아메리카린제 에이에스도 12.04% 지분을 갖고 있다. 빌헬름센은 2004년 정 부회장의 글로비스 지분을 매입했고, 현대차와 전략적 제휴 관계를 맺고 있다.
정 부회장의 현대차, 기아차, 현대모비스의 지분은 각 2.62%, 1.74%, 0.32%로 현대글로비스에 비해 점유율이 한참 낮다. 계열사 지배력이 약한 정 부회장으로서는 현대글로비스를 통해 경영권 승계를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해나갈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현대글로비스의 가치를 높여야 하는데, 중고차 시장 진출이 규모를 키우는 핵심적인 사업이 될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현대차그룹의 지주사 전환 과제와 맞물리면서 현대글로비스가 향후 경영권 승계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핵심고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훈 현대글로비스 대표는 지난해 기준으로 18조3000억원의 매출 규모를 2025년 40조원까지 늘리겠다는 중장기 전략을 발표했다. 현대글로비스의 중고차 시장 진출이 본격화되면 이런 전략 구상은 더욱 탄력을 받게 된다.
그러나 현대차는 중고차 시장 진출과 관련해 현대글로비스와의 연결고리에 선을 그었다. 현대차 관계자는 "현대차가 직접 중고차를 판매하고 도매업이 아닌 소매업 형태가 될 것"이라며 "소비자 보호 차원에서 중고차 사업은 반드시 필요하다. 현대기아차는 완성차 업체로서 객관적인 가격, 품질, 정보 등을 중고차 시장에 공유하고 소비자들이 믿고 살 수 있는 고품질의 중고차를 공급해 선택의 폭을 넓히고자 한다. 지배구조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라고 설명했다.
한편 정 부회장은 국내 4대 그룹 중 유일하게 순환출자 구조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대기업 오너가는 계열사 간 순환 출자로 지배력을 높여왔는데, 정 부회장은 현대·기아차 지분율이 낮아 할 수 없었다.
만약 현대글로비스의 가치가 높아지면 현대차그룹은 현대모비스와 분할합병을 다시 시도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긴다.
현대차가 현대글로비스를 통해 2018년 철회한 분할합병을 다시 추진한다면 정 부회장의 계열사 지배력 강화 과제도 손쉽게 풀릴 수 있다. 더군다나 당시 끈질기게 늘어지며 합병안 무산을 이끌었던 미국계 행동주의펀드 엘리엇이 현대차그룹 주식을 모두 매각한 상태다.
정 부회장은 2018년 9월 본격 총괄 수석부회장에 오르면서 3세 경영을 본격화했다. 하지만 그동안 지분을 통한 지배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어왔던 게 사실이다. 정 부회장이 '현대글로비스'라는 마지막 퍼즐을 통해 경영권 승계에 마침표를 찍고, 오너 지분으로 그룹의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