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BA 코트를 지배한 '킹'이, 미 대선이라는 체스판에서 '룩'으로 변했다. 상대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적이 많다. 대통령이라는 지위에 개의치 않고 거침 없는 발언과 행동으로 사람들을 당혹케 한다. 정치계 뿐만 아니라 언론계, 법조계, 문화예술계 등 각계 각층에 수많은 적을 두고 있는 이유. 최근 끝난 미국프로농구(NBA) 챔피언 결정전에서 LA 레이커스를 10년 만에 우승으로 이끈 '킹' 르브론 제임스(36·LA 레이커스) 역시 그의 적 중 하나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0일(한국시간), 한 라디오 방송에서 NBA 플레이오프 시청률에 대해 얘기하며 제임스의 이름을 언급했다. 당연하게도 그 내용은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NBA가 너무 정치적인 집단이 되면서 이제 아무도 관심이 없다. 르브론 제임스는 아주 대단히 볼썽 사나운 민주당 대변인"이라고 조롱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제임스에게 이런 조롱을 퍼부은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8월에는 폭스스포츠 라디오 방송 인터뷰에서 사회자에게 '마이클 조던이냐, 르브론 제임스냐'라는 질문을 받고 지체 없이 조던이라 답한 뒤 "나는 두 선수의 활약을 모두 봤다. 게다가 조던은 정치적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 좋아한다"고 비판했다. 조지 플로이드 사건으로 인해 '흑인 생명도 중요하다(BLM·Black Lives Matter)' 운동이 미 전역을 휩쓸던 무렵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인종차별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경기 전 무릎을 꿇는 NBA 선수들을 향해서도 "용납할 수 없다"며 경기를 보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제임스의 대답이 걸작이다. 제임스는 "그가 안 봐도 경기는 계속될 것이다. 농구계는 그가 시청하지 않는다고 슬퍼하지 않는다"고 맞받아쳤다.
트럼프 대통령과 제임스의 대적 관계는 대선 전부터 시작됐다. 2016년 미국 대선 당시 제임스는 민주당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 지지를 선언했고,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에도 그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2017년 트럼프 대통령이 인종차별에 반대해 '무릎 꿇기 세리머니'를 시작한 프로미식축구리그(NFL) 선수 콜린 캐퍼닉을 두고 욕설을 퍼부은 게 발화점이 됐다. 제임스는 곧바로 트위터에 트럼프 대통령을 "쓸모 없는 인간"이라고 비난하며 "당신이 등장하기 전까지 백악관에 초청되는 건 큰 영예였다"고 조롱했다. 이들의 공방은 2018년에도 계속됐는데, 제임스가 CNN 앵커 돈 레먼과 인터뷰에서 "그가 스포츠를 이용해 우리를 분열시키려 한다"며 트럼프 대통령의 인종차별주의적 태도를 비판해 재점화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에 "르브론 제임스가 방금 텔레비전에서 가장 멍청한 사람과 인터뷰를 했다. 그 때문에 제임스가 똑똑해 보였다. 그러기 쉽지 않은 일인데 말이다"라며 비꼬았다. 이 발언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은 많은 이들에게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후에도 계속 이어진 둘의 대립 관계에 대해 미국 인터넷 매체인 더 언디피티드는 "제임스는 트럼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통령은 '킹'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고 평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제임스와 공공연한 적대 관계를 쌓은 반면, '농구광'으로 유명한 버락 오바마(59) 전 미국 대통령은 그와 아주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흑인 인권 문제와 사회 복지 등에 관심이 많은 제임스는 지난 대선 때도 오바마 전 대통령에 대한 '무한 신뢰'를 보인 바 있다. 당시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한 공식적인 이유도 "내 좋은 친구인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유산을 이어갈 후보"이기 때문이었을 정도다.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이냐,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의 당선이냐가 걸린 이번 대선을 앞두고, 오바마 전 대통령에게 제임스의 우승은 여러 의미에서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막바지로 치달아가는 선거전에서 바이든 후보 지지를 위해 총력 지원을 예고하고 있다. 제임스가 엄청난 활약으로 LA 레이커스의 우승을 이끈 지난 13일, 오바마 전 대통령은 트위터에 "내 친구인 제임스가 자랑스럽다"며 "네 번의 우승, 네 번의 파이널 MVP를 받은 이 선수는 코트 안에서는 물론 교육과 사회 정의, 우리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온 특별한 리더"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제임스가 이룩한 농구 선수로서 성취 뿐만 아니라 그동안 인종차별에 대해 꾸준히 목소리를 내고, 반(反) 트럼프적 행보를 계속해 온 점을 강조한 것이다.
CNN 또한 "제임스의 우승은 스포츠뿐만 아니라 자유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승리"라며 "흑인의 존엄성과 시민권을 위한 투쟁에 나선 슈퍼스타", "NBA의 슈퍼스타이자 인종간 정의와 형평성 문제에 대해 가장 솔직하게 의견을 말하는 선수 중 한 명"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또 "여러 가지 면에서 제임스와 NBA는 '안티 트럼프'를 대표한다. 그는 대통령을 비롯해 그 세력들이 유권자들을 압박하기 위해 표적으로 삼은 흑인, 그리고 유색 인종 공동체에 대한 투표권을 지지한다"고 덧붙였다. 이런 기대에 부응하듯, 제임스는 오바마 전 대통령의 부인인 미셸 오바마 여사와 함께 사전투표 참여 운동을 펼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