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여 전 김태균(38·한화)에게 그의 별명에 관해 물었다. "어느 별명이 가장 마음에 드는가"는 질문에 그는 "다 마음에 든다"고 답했다. '김고자(鼓子)' 같은 괴상한 별명도 좋으냐고 물었더니 그는 낄낄 웃었다.
지금은 박용택(41·LG)의 별명도 많지만, 얼마 전까지 KBO리그의 별명왕은 김태균이었다. 대표 별명이 '김별명'이다. 심지어 김태균은 부모님이 지어준 별명이라는 설도 있다.
그는 22일 은퇴 기자회견을 끝으로 20년 프로 선수 경력을 마감했다. 그는 수많은 기록을 남겼다. 프로야구가 출범한 1982년 태어난 김태균은 2001년 한화에 입단했다. 올 시즌까지 통산 타율 0.320(5위), 안타 2209개(3위), 홈런 311개(11위), 출루율 0.421(1위), 볼넷 1141개(2위), 타점 1358개(3위)를 기록했다. 이승엽·양준혁 등 왼손 타자들이 점령한 순위표에서 오른손 타자 김태균의 성적이 특히 돋보인다.
그는 수많은 별명도 남겼다. 주루하다 넘어지면 김꽈당, 강습 타구에 급소를 맞고 쓰러지면 김고자가 됐다. 김비켜·김우쭐·김뱃살·김우울·김음흉 등 하루에도 몇 개씩 별명이 만들어졌다.
이전까지 스포츠 스타의 별명은 스포츠 미디어의 몫이었다. 인터넷 커뮤니티가 활성화되기 시작한 2000년 초, 야구팬들에게 가장 흥미로운 유희의 대상은 김태균이었다. 그도 인터넷을 보며 즐거워했다.
김태균은 2010년 FA(자유계약선수)가 되어 일본(지바 롯데)에 진출했다. 이듬해 한국으로 돌아올 때 다시 FA가 된 그는 처음부터 "한화와만 협상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김태균 잡아올게"라고 팬들과 약속한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말이 있었다. 김태균은 2012년 당시 프로스포츠 최고 연봉(15억원)을 받았다. 그 시즌 중반까지 4할 타율을 기록하더니 타격왕(0.363)에 올랐다.
김태균에 대한 별명은 계속 늘어났다. 2012년 이후에는 부정적인 별명도 많이 생겼다. 한화는 반짝 상승했던 2018년(정규시즌 3위)을 제외하고 긴 암흑기를 보냈다. 팬들의 실망감과 분노는 사장·감독뿐 아니라 선수들에게도 쏟아졌다.
팀 최고 연봉자이자 4번 타자인 김태균이 집중적으로 공격 받았다. 매년 3할 넘는 타율과 20개 안팎의 홈런을 쳐도 '김똑딱'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볼넷을 얻어도 "팀 성적이 아닌 개인 기록만 챙긴다"는 모함도 받았다.
팀 성적과 개인 기록은 반대 개념일 수 없다. 타순이 명확히 정해져 있기 때문에 개인 성적과 팀 기여도의 상관관계가 크다. 선수의 가치를 가장 잘 표현한다는 WAR(대체 선수 대비 승리 기여도)에서 김태균은 KBO리그 타자 중에서도 역대 4위(스탯티즈 기준 69.10)다.
2017년 이후 팬들의 기대만큼 홈런을 많이 때리지 못했다. 특히 공인구 반발력이 높았던 '홈런 인플레' 시대여서 더 그래 보였다. 김태균은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잘하려 했다. 나쁜 공에 스윙 하지 않았고, 히팅 포인트를 최대한 뒤에 만들어 정확하게 타격했다. 중심이동을 최소화한, 장타(長打)보다 정타(正打)를 치는 메커니즘이었다.
김태균은 자신이 가진 능력 안에서 가장 생산성 높은 스윙을 만들어 유지했다. 그가 2012년 올스타 홈런더비에서 우승하자 한 외국인 투수는 "놀랄 일이 아니다. 김태균이 마음만 먹으면 더 많은 홈런을 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스트라이크존 앞에서 때리기도 하지만 존을 통과한 공도 때려내는 타자"라고 말한 바 있다. 김성근 전 한화 감독 등의 이론가들도 김태균의 타격을 리그에서 가장 높게 평가했다.
김태균은 지난 2년 동안 부상과 부진에 시달렸다. 올해도 왼 팔꿈치 충돌 증후군을 참고 뛰다가 지난 8월 재활군에 내려갔다. 이 기간 김태균의 장타력은 많이 감소했다. 재활군에서 긴 시간을 보내며 그는 선수 생활을 마무리할 때라고 판단했다.
김태균은 이승엽이나 박용택처럼 '은퇴 시즌'을 미리 정하지 않았다. 지난겨울 구단의 2년 FA 계약 제안을 거절하고 1년 계약을 선택했다. 더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김태균을 대체할 중심타자를 한화가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게 한화가 지금도 고전하는 이유, 김태균에게 악플 같은 별명이 생긴 까닭이다. 은퇴 발표와 함께 김태균의 20년 기록이 멈췄다. 그의 야구인생과 함께한 별명도 더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김태균은 "쿨하게 마무리하려 했지만, 막상 은퇴 발표를 하니 기분이 이상하다"고 말했다.
은퇴 기자회견은 예상과 달랐다. 김태균은 눈물을 왈칵 쏟았다. 한동은 울음을 참지 못했던 그는 "천안 출신이여서 항상 한화를 보며 꿈을 꿨다. 한화 선수로 뛰어 정말 행복했다. 영광스러운 시간이었다"며 "우승을 해서 팬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다는 약속을 한 번도 지키지 못했다. 평생 한으로 남을 것 같다. 후배들이 내 한을 풀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태균의 미래는 정해지지 않았다. 우선 내년부터 단장 보좌 어드바이저로서 제2의 야구인생을 시작한다. 후배들에게 생생한 경험을 전하는 게 그의 첫 임무다. 김태균은 "우리 팀에는 젊고 유망한 선수들이 많다. 그들에게 좋은 기회를 만들어 줘야한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가 예상보다 이른 은퇴를 결심한 것, 그리고 은퇴경기를 거절한 것도 후배들에게 조금이라도 기회를 더 주기 위해서였다.
그런 뜻에서 김태균은 웃으며 기자회견을 진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눈물을 뚝뚝 흘렸다. 다양한 별명만큼 여러 감정이 북받쳤던 것이다. 아쉬움과 미안함, 고마움, 외로움, 괴로움이 범벅된 눈물이었다.
마지막으로 김태균에게 어떤 별명을 가장 좋아하는지 물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한화의 자존심"이라고 말했다. 그 답지 않은, 재미없는 답변이었다. 한화의 원클럽맨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운 모양이다. 그게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