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프로배구 최고의 스타로 꼽혔던 이재영(24·흥국생명)이 2020~21시즌 V리그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주요 개인 순위에서 5위 안에 드는 부문이 없다. 9경기에 나와서 총 득점 6위(181점), 공격 성공률 6위(37.64%)에 올라있다. 레프트로서 리시브에서도 발군이었던 이재영은 올해는 이 부분에서 12위(32.86%)다. 지난 시즌에는 무릎 부상으로 17경기밖에 나오지 못했지만 득점 5위(432점), 공격 성공률 4위(40.58%), 리시브 5위(38.64%) 등을 기록했다.
지난 2014년에 프로에 데뷔한 이재영은 엄청난 공격력과 탄탄한 수비로 단숨에 수퍼스타로 떠올랐다. 2014~15시즌을 마치고 신인상을 탔고, 2016~17시즌에 정규리그 MVP를 수상했다. 2018~19시즌에는 정규리그, 챔피언결정전, 올스타전 등 주요 MVP를 싹쓸이했다. 2015~16시즌부터 2018~19시즌까지 4시즌 연속 국내 선수 득점 1위에 오르는 등 매 시즌 꾸준한 톱클래스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이에 힘입어 지난 4월 FA(자유계약) 자격을 얻어 연봉 총액 6억원에 계약, 팀내 연봉 1위가 됐다.
이재영은 화려한 새 시즌을 예고했지만, '배구 여제' 김연경(32·흥국생명)이 해외 생활을 접고 V리그에 돌아오면서 화제의 중심에서 점점 밀려났다. 경기에서도 김연경 활용도가 높아졌다. 김연경은 득점 4위(221점), 공격 성공률 1위(47.88%), 서브 1위(세트당 평균 0.46개) 등으로 이번 시즌 최고의 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경기 후 인터뷰도 김연경 차지다. 김연경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배구판이 들썩일 정도다. 이재영이 유독 화제가 되는 때는 공개 열애 중인 프로야구 SK 와이번스 투수 서진용(28)이 경기장을 찾아 응원하는 모습이 포착될 때 정도다.
그래도 이재영은 그 어느 시즌보다 씩씩하고 밝은 모습이다. 그는 "지치지 않는 시즌이라서 정말 좋다. 그동안은 (김)연경 언니 같은 존재감 있는 공격수가 없어서 다소 힘들었다. 연경 언니가 오면서 부담이 줄어서 좋다"며 웃었다. 이재영은 신인 때부터 에이스 역할을 맡으면서 고생했다. 항상 "내가 잘해야 한다"고 다짐했는데 그 부담감이 상당했던 모양이다. 6년 만에 자신을 짓눌렀던 '막내 에이스'란 꼬리표를 떼어버린 모습이다. 승부처에서 이재영에게 공격이 집중됐는데, 이번 시즌에는 김연경과 이재영으로 양분되고 있다. 공격 점유율에서 이재영이 34.59%, 김연경이 31.45%로 비슷하다. 쌍둥이 동생인 세터 이다영(24·흥국생명)과 함께 뛰는 것도 이재영에게는 힘이 되고 있다. 그는 "다영이와 어렸을 때부터 호흡이 잘 맞았는데, 같은 팀이 되면서 한결 편하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이재영은 부상 악몽에서도 벗어난 모습이다. 공격수로서 많은 점프를 하다 보니 이재영은 고질적인 무릎 통증에 시달렸다. 지난 시즌까지 이재영은 경기가 끝나면 무릎에 얼음팩을 차고, 지친 얼굴로 구단 버스를 탔다. 너무 지쳐서 경기 후 인터뷰에서도 특유의 발랄함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 시즌에는 얼음팩도, 지친 표정도 볼 수가 없다. 그는 "무릎에 물이 차지 않는다. 웨이트 트레이닝이나 몸 관리는 지난 시즌과 크게 다르지 않는데, 몸이 가뿐하다"면서 좋아했다.
그래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에이스 시절이 그립지 않을까. 이재영은 "아쉬운 마음은 전혀 없다. 다영에게도 점수를 올려야 하는 중요한 순간에는 연경 언니에게 토스하라고 한다"고 전했다. 승부욕이 강한 이재영은 원래 욕심이 많았다. 그래서 경기가 잘 안 풀릴 때는 그만큼 스트레스도 컸다. 선수 생활을 이재영보다 더 오래 한 김연경은 그런 이재영을 향해 "너무 욕심이 과하면 힘들다. 욕심을 내려놓는 것도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김연경을 잘 따르는 이재영은 "개인적인 욕심은 버리려고 한다. 팀이 통합 우승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내 개인 성적을 생각하면 팀에는 마이너스이기 때문이다"라고 다부지게 말했다.
흥국생명은 '흥벤저스'라 불리며 이번 시즌 여자 프로배구 최강 팀으로 꼽혔다. 한편으로는 개성이 강한 엄청난 스타들이 모여 오히려 '모래알 조직력일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맏언니 김연경이 잘 이끌고, 이재영이 개인 욕심을 버리면서 역대 최고의 팀이 되고 있다. 흥국생명은 개막 9연승을 달리면서 승점 25점으로 1위를 달리고 있다. 2위 GS칼텍스(6승 4패·승점 18)와는 승점 7점 차로 점점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이재영은 "우리 팀은 방심하지 않는다. 매 경기 이길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