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가 후배를 칭찬하자, 후배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선배는 또 칭찬하며 용기를 북돋워 줬다. 그라운드에서는 서로 다른 유니폼을 입고 있지만, 말끔한 슈트를 차려 입으니 훈훈한 선·후배의 모습이었다.
둘의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었던 무대는 지난 8일 열린 조아제약 프로야구대상 시상식이었다. '선배'는 KIA 최형우(37), '후배'는 KT 배정대(25)다.
이번 시상식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 수칙을 준수해 최소 인원만 초청해 1~4부로 나눠 진행됐다. 1부에 자리한 '최고 타자상' 최형우, '수비상' 배정대, '신인상' 소형준 등 3명만 한 테이블에 앉았다.
최형우가 자리에 앉은 뒤 대뜸 "(소)형준이는 투수여서 내가 할 말이 특별히 없지만, (배)정대는 진짜 최고였다"라고 덕담을 건넸다. 그러자 배정대는 '12년 선배' 최형우가 어려운지 "아닙니다"라고 작은 목소리로 쑥스럽게 답했다. 최형우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뭔지 아니?"라고 물었다. 그는 이내 "(군대에서 자주 사용하는) 아닙니다"라고 해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었다.
긴장이 풀린 배정대는 고민 한 가지를 털어놓았다. "장타력을 좀 더 늘리고 싶다"고 했다. 최형우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슬럼프에 빠지면 변화를 주기 위해 고민하고, 타격폼을 바꿀 수도 있어. 그런데 너는 지금 엄청나게 잘하고 있잖아. 그대로 밀고 가. 지금 최고라니까"라고 했다.
최형우는 2002년 포수로 삼성에 입단한 뒤 방출됐다. 경찰 야구단에 입대해 외야수로 포지션을 전향했고, 타격 장점을 극대화하고자 치열하게 고민했다. 이런 노력 끝에 제대와 동시에 삼성에 재입단, 리그 최고 타자로 자리매김했다. 프로 19년 차인 올해 타격왕(0.354)에도 올랐다.
4년 전 KIA와 4년 총액 100억 원에 FA(자유계약선수) 계약을 맺은 그는 30대 후반의 나이에도 여전한 기량을 선보인다. 14일 KIA 구단이 발표한 최형우와 3년 최대 47억 원(계약금 13억 원, 연봉 9억 원, 인센티브 7억 원)의 FA 계약이 이를 방증한다. 최형우는 "다시 한 번 우승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라고 밝혔고, 구단은 "동료 선수에게 귀감이 되는 등 그라운드 안팎에서 좋은 기운을 불어넣는 최형우와 계속 함께해 기쁘다"라고 전했다.
그런 최형우의 눈에 배정대는 장점이 많은, 매력적인 선수다. 최형우는 "너는 타율 2할8푼~2할9푼만 쳐도 인정받는다. 타격 외에도 다 잘하잖아? 최고라니까"라며 극찬했다. 그러면서 "난 오로지 치는 것밖에 (장점이) 없는데…"라며 부러워했다. 이번에도 배정대는 "아닙니다"라고 답했다.
배정대 역시 최형우와 마찬가지로 무명의 시절을 보낸 끝에 주전으로 발돋움했다. 2014년 LG 2차 1라운드 3순위 유망주로 입단한 그는 이듬해 신생팀 특별지명으로 KT 유니폼을 입었다. 지난해까지 211경기에서 타율 0.180에 그친 배정대는 올해 전 경기에 출장해 타율 0.289, 13홈런, 65타점, 88득점, 22도루를 기록했다. 특히 그는 수비 범위가 넓고, 강한 어깨를 자랑한다. 조아제약 프로야구대상 시상식에서 '수비상'을 받은 이유다.
본지의 칼럼을 기고 중인 김인식 전 국가대표 감독은 "반갑다 배정대, 삼박자 갖춘 우타 외야수"는 제목(7월 10일 자)으로 그의 활약을 조명한 적 있다. 당시 김 전 감독은 "한국 야구의 발전을 생각하며 배정대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대표팀에 귀한 우타 외야수, 25세의 젊은 외야수로 기대감이 크다"라며 "콘택트, 장타력, 주력이 좋다. 대표팀 외야수의 송구가 약한 편이었는데, 배정대는 외야에서 홈까지 바운드 없이 송구할 수 있는 어깨를 지녔다. 차세대 국가대표 외야수"라고 했다. 배정대는 올 시즌 외야 보살 13개로 이 부문 전체 1위였다.
국가대표 외야수 출신인 최형우에게 김인식 감독의 평가를 전하자 "당연하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배정대를 엄청나게 칭찬한다'고 하는 기자의 얘기에도 최형우는 "KT가 올 시즌 좋은 성적을 올린 원동력의 20%는 배정대 때문이다. 만약 얘가 없었더라면, KT의 센터 라인이 이처럼 강할 수 없었다"라고 분석했다.
최형우는 평소에도 배정대를 칭찬했다. 배정대는 "지인을 통해서도 최형우 선배님의 칭찬을 전해 듣곤 했다"고 말했다. 최형우는 후배에게 밥을 잘 사고 알뜰히 챙기는 선배로 통한다.
배정대는 "올 시즌 중반까지 보여준 퍼포먼스를 계속 보여줬으면 좋을 텐데 후반에 떨어져서…"라며 아쉬워했다. 7월까지 0.331였던 그의 타율은 8월 이후 0.247로 뚝 떨어졌다. 최형우는 "그건 당연하다. 어떻게 계속 잘할 수 있나"며 "좋은 타격감을 유지하려고 계속 노력하면 된다"라고 조언했다. 배정대의 또 다른 장점인 수비와 주루에는 슬럼프가 없다는 요인도 고려했다. 최형우는 "어떻게 갑자기 그렇게 잘하는 거야?"라며 되묻기도 했다.
대선배와의 '야구 이야기'는 까마득한 후배에게 큰 용기와 자신감을 가져다주었다. 배정대는 "최형우 선배와 특별히 인연이 있었던 건 아니다. 야구장에서 인사를 드리면 잘 받아주셨다"라며 "시상식에서 같이 앉게 돼 궁금한 걸 여쭤봤다. 내게 용기를 주면서 '계속 그대로 밀고 나가라'고 말씀해주셔서 정말 감사했다. 좋은 시간이었다"라고 말했다.
방출의 설움을 딛고 골든 글러브만 6회 수상한 선배의 격려는 이제 막 시상대에 오른 후배에게 큰 힘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