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이노베이션이 LG에너지솔루션(전 LG화학 배터리 부문)과의 ‘세기의 배터리 소송’에서 패하면서 2조~3조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금액의 합의금을 지불해야 할 위기에 처했다. SK그룹의 성장 동력인 배터리 부문이라는 점에서 피해 최소화를 위해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과감한 결단이 요구되고 있다.
14일 업계에서는 최 회장이 오는 3월 24일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에 취임하기 전 배터리 소송과 관련해 LG에너지솔루션과의 대승적인 합의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서울상공회의소 겸 대한상의 수장으로 단독 추대된 최 회장은 “상의와 국가 경제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겠다”고 수락 의사를 밝힌 바 있다.
대한상의 회장은 경제계를 대표하는 얼굴이다. 국내 기업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야 한다는 점에서 책임감이 막중하다. 기업들을 위한 규제 완화에 힘써야 하는 자리라 전 세계적인 관심을 받는 SK이노베이션(이하 SK이노)의 소송 장기화는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이에 4대 그룹 총수 중에서도 ‘맏형’ 역할을 하는 최 회장이 솔선수범하는 리더십을 보여줄 수 있을지 관심을 끌고 있다.
소송의 조기 해결을 바라는 국내외적인 압박도 상당하다. 지난 11일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 최종 판정 결과, SK이노는 LG에너지솔루션의 영업 비밀을 침해한 배터리·부품과 관련해 ‘미국 내 수입 금지 10년’이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다만 SK이노의 전기차 배터리를 사용하는 폭스바겐과 포드의 경우 수입을 각각 2년, 4년 유예했다. 그러자 폭스바겐은 13일 성명을 내고 “소송 분쟁으로 인한 의도하지 않은 피해를 봤다”며 미국 정부에 최소 4년 동안 SK이노의 배터리 수입 유예를 요청했다. 폭스바겐 등 전적으로 SK이노의 배터리에 의존하고 있는 고객사 입장에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SK이노는 현재 조지아주에 3조원을 투자해 연간 43만대 분량(21.5GWh)의 전기차 배터리를 생산할 수 있는 1, 2공장을 건설 중이다. 공장 건설로 큰 경제효과를 기대하는 조지아주도 불똥이 튀진 않을지 노심초사하고 있다.
브라이언 켐프 조지아주 주지사는 급기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 SK이노의 전기차 배터리 공장 건설이 타격받을 수 있다며 ITC의 결과에 대한 거부권 행사를 요구하고 나섰다. 켐프 주지사는 “불행히도 ITC의 결정은 2600개의 청정에너지 일자리와 혁신적인 제조업에 대한 상당한 투자를 위험에 빠뜨린다”고 했다.
국내에서는 총리가 나서 합의를 촉구했다. 정세균 국무총리는 지난 1월 방송기자클럽 토론회에서 LG와 SK의 소송과 관련해 “정말 부끄럽다. 한국 배터리 산업의 미래가 앞으로 크게 열릴 텐데 양사가 작은 시장을 놓고 싸우지 말고, 세계 시장을 향해 적극적으로 나서길 바란다”고 말했다.
2019년 소송전 돌입 후 SK이노는 합의보다는 일단 ITC 판결을 지켜보자는 입장을 견지했다. 이에 최 회장 역시 판결 전까지 어떤 결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최종 판결이 나왔고, 국익 차원에서도 미국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쉽지 않다는 의견이 지배적인 상황이어서 이제는 최 회장이 움직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LG에서 요구하는 합의금은 2조~3조원 규모로 그룹 총수가 아니면 결단을 내릴 수 없는 천문학적인 액수다. SK 측은 "남은 절차에서 SK 배터리의 안정성과 미국 조지아주 공장의 공익성을 집중적으로 전달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전례가 드문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기대하며 장기전을 이어가기에는 부담이 크다. 수천억 원의 소송비용도 비용이지만 자칫 미래 성장 동력마저 잃어버릴 수도 있는 중대한 위기 상황이다. 만약 합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신뢰도 하락으로 고객사를 잃을 위험도 있다
4대 그룹 총수들을 만나는 모임을 주최하기도 하는 최 회장은 구광모 LG그룹 회장과의 대승적인 합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 업계 관계자는 “ITC 판결이 나기 전에는 사적인 모임에서 소송 얘기를 꺼내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다"며 "하지만 이제는 판결이 나온 데다 시간을 끌수록 좋을 게 없는 상황이라 SK와 LG 총수가 ‘탑다운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장이 열렸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