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 이준익 감독이 돌아왔다. 줄줄이 컴백을 준비 중인 1000만 감독 중 가장 먼저, 믿고보는 사극으로 관객들을 만난다. 2021년 극장의 문을 본격적으로 열게 될 한국영화 '자산어보'다. '동주'에 이어 흑백의 미(美)를 담아냈고, 잔잔하면서 강단있는 힘으로 시대를 넘어서도 통용될 이야기를 펼쳐냈다.
그 어느 때보다 역사물에 대한 예민함과 민감함이 하늘을 찌르고 있는 시기. 애초 창작의 범위와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짓는 것은 물론, 가르칠 수 있는 이준익 감독 입장에서는 날조라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고증과 수정에 많은 공을 들였다. 당연한 과정이 당연하지 않을 때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자산어보'는 영화적 창작물이라는 정체성 아래 교과서에도 담지 못한 역사물의 가치까지 충분히 이행한다.
-설경구·변요한 뿐만 아니라 이정은 배우의 힘도 대단했다. 가거댁은 얼굴만 봐도 마음이 훅 가면서 눈물이 나더라. "가거댁이 집주인인데 약전이 집주인처럼 보이지 않나. 손님으로 왔는데 주인같이 보여주게 만든다. 가거댁의 설정이 그러했지만 이정은이라는 배우가 품어주는 포용력이 어마어마해 잘 녹아들 수 있었다. 최고의 호스트였다."
-'동주'에 이어 또 한번 흑백영화에 도전했다. "'자산어보'는 소재 자체가 상업적이지 않다. 제작비를 많이 쓰면 안 된다. 사극은 최소 100억이다. 흑백으로 쓰면 그나마 단가가 좀 떨어진다. '망해도 적게 망하자. 그래야 내 수명을 조금 더 늘린다'는 마음이 있었다. 진심이다. 하지만 물질적 가치만으로는 내 명분에 차지는 않았다. 흑백 영상물은 '동주'를 통해 약간의 자신감이 생긴 것도 사실이다. '흑백은 지나간 과거의 구시대적 유물이 아니다. 21세기 흑백은 보다 더 새로운 것이고, 그걸 증명하면 된다'는 나와의 약속을 하게 됐다. '동주'는 5억이라는 초 저예산으로 촬영해 답답한 흑백의 난무함이 그대로 표현됐다. '자산어보'는 그것보다는 좋은 카메라를 쓰고, 자연 풍광까지 담아낸다면 '밑지지 않지는 않을까?' 싶었다. 아직까지는 통한 것 같다. 영화는 결국 스코어로 결론지어진다. 감독으로서 흥행, 즉 관객의 선택에 대한 결과를 외면할 수는 없다."
-흑백에 적합한 영화는 무엇일까. "드라마가 강렬해야 한다. '자산어보'는 잔잔해보여도 감정의 스펙터클이 명확히 존재한다. 보통 흑백 영상을 다루는건 독립영화들이 많은데 그저 잔잔하다. 잠자기 딱 좋다. 내가 '나는 상업영화 감독이다'는 것을 자꾸 어필하는 이유는 흑백을 떠나 현실적으로 상업성을 구현해내야 한다. 예술영화 하는 것도 아니고. 영화를 찍으려면 투자를 받아야 하는데 그럼 누가 투자를 해주나. 시나리오 100편 쓰면 뭐하나. 투자 못 받으면 한 편도 제대로 쓴 것이 아니다."
-코로나19 여파가 크기도 했지만, 극장을 넘어 OTT의 영역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영화를 비롯한 콘텐츠 산업 전반이 격동의 시대를 맞았다. "피할 수 없다면 최대한 활용해야 할 것이다. 지금 시기에 극장은 너무나 위기 상태에 놓여있다. 이렇게 딱 1년만 더 가면 극장은 문을 닫아야 한다. 극장이라는 공간 자체가 구제불능이 될 것이다. 영화는 극장이 살아야 한다. 극장이 없으면 영화도 죽는다. OTT 채널도 좋지만 영화의 뿌리는 결국 극장이다. 좋은 콘텐츠를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극장을 살리는게 우선이다. 다행히 코로나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고 3월에는 '미나리'가 한계단 쌓았고, '자산어보'가 두번째 계단을 쌓으면 좋지 않을까 싶다. 영화가 떠들지 관객이 떠드나. 어느 곳보다 안전한 극장이라고 하지 않나.(웃음) 뒤로도 100여 편이 밀려 있다는데 차근차근 나와주길 희망한다. 만약 '자산어보'의 성과가 좋다면 영화 뿐만 아니라 극장에 기여했다는 보람도 있을 것이다. 그걸 바라고 있다."
-'자산어보'를 통해 '이준익은 역시 사극이다'는 평도 자자하다. "전작으로부터 멀리가고 싶은 욕망은 창작자의 숙명이다. 전작이 잘됐다고 그걸 또 복사하면 그게 바로 매너리즘의 지름길이다. 아주 멀리가게 될 것이다. '변산'으로 한번 멀리 다녀왔으니 '자산어보'로 돌아올 수 있었지.(웃음) '변산'이 없었다면 '자산어보'도 없었을 것이다. 성의있게 실패하는 것은 보약이다. '변산'은 열심히, 성의있게 실패했다. 실패자의 미덕을 폄하하면 안 된다. 그것을 동력삼아 더 큰 성과를 낼 수 있다. '변산' 작가와 '자산어보' 작가도 같다."
-'자산어보' 이후의 행보는 어떻게 될까. "준비하고 있는건 많은데 그것 역시 '자산어보'의 결과가 결정지어줄 것이다. 의식의 흐름이다. '자산어보'가 어떤 동력을 만들어내줄까 나도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