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한국시각) 미국 캘리포니아주 칼스배드의 아비아라 골프클럽.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KIA 클래식 최종 라운드 16번 홀(파4) 티박스에서 박인비(33)가 3번 우드를 잡고 호쾌한 티샷을 날렸다. 곧장 그린에 올라간 공은 홀과 약 10m 거리에 섰다. 그린에 선 박인비는 신중하게 이글 퍼트를 시도했다. 공은 그대로 홀로 빨려 들어갔다. 그린 주변에서 이를 지켜본 대회 관계자들이 탄성을 질렀을 정도로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골프 여제’ 박인비가 압도적인 우승을 거뒀다. KIA 클래식 첫날부터 선두에 올랐던 박인비는 최종 라운드까지 한 번도 리더보드 최상단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최종 라운드에서 이글 1개, 버디 3개, 보기 3개로 2타를 줄인 그는 합계 14언더파로 공동 2위 렉시 톰슨(미국), 에이미 올슨(미국·이상 9언더파)을 5타 차 제치고 우승했다. 지난해 2월 호주여자오픈 이후 13개월 만의 우승, LPGA 투어 개인 통산 21승이었다. 한국 선수 중 올 시즌 첫 LPGA 투어 우승이기도 했다.
우승을 확정한 뒤, 박인비는 남편인 남기협 코치를 비롯해 유소연, 김효주, 이정은 등 후배 골퍼들의 축하를 받았다.
박인비에게는 이번 대회가 시즌 첫 대회였다. 다음 달 1일 개막하는 시즌 첫 메이저 대회 ANA 인스퍼레이션의 전초전 격으로 이번 대회에 나섰다. 그도 “메이저 대회를 위한 준비를 하러 나왔을 뿐”이라고 했다. KIA 클래식과의 악연도 주목받았다. 그는 대회가 처음 열린 2010년부터 KIA 클래식에 꾸준하게 출전했지만, 우승 없이 준우승만 3차례(2010·2016·2019년) 거뒀다.
이번 대회에서 그의 경기력은 압도적이었다. 이번 대회 그린 적중률은 81.9%(59/72), 페어웨이 안착률은 76.7%(43/56)로 샷 감각이 좋았다. 특유의 ‘컴퓨터 퍼트’도 돋보였다. 박인비는 시즌을 준비하던 지난달 16일 온라인을 통한 기자회견에서 “스윙에는 큰 변화를 주지 않았다. 대신 퍼팅 스트로크를 좀 더 일관성 있게 하려고 연습했다”고 말했다. 이번 대회 최종 라운드에선 퍼트수가 32개였지만, 16번 홀 이글 퍼트 등 승부처마다 나온 깔끔한 퍼트로 경쟁자들의 추격을 뿌리쳤다.
2016년 리우올림픽 여자 골프 금메달을 땄던 박인비는 도쿄올림픽이 열리는 올해 목표 의식을 다시 잡았다. 그는 “올림픽 출전이라는 구체적인 목표가 생겼다. 올림픽이 개최된다는 가정 아래 열심히 준비하려 한다”고 말했다.
박인비에게는 3개월여 공백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준우승한 렉시 톰슨은 “박인비의 플레이가 대단했다. 그를 따라잡는 건 힘겨운 일이었다”고 말했다. 박인비는 우승자 공식 인터뷰에서 “내가 경기하고도 결과를 믿을 수가 없었다. 내 예상을 크게 뛰어넘은 결과다. 경기를 잘 치러 매우 기쁘다”고 말했다.
박인비는 이번 우승으로 다양한 기록도 함께 세웠다. 이번 대회 우승 상금 27만 달러를 추가한 그는 안니카 소렌스탐(스웨덴·2257만7025달러), 카리 웹(호주·2027만249달러), 크리스티 커(미국·2002만5233달러)에 이어 LPGA 투어 사상 네 번째로 총 상금 1700만 달러(1700만3925 달러·192억원)를 돌파했다. 또 박세리(25승)가 가진 한국인 통산 최다 우승 기록에도 4승 차로 다가섰다. 박인비는 “박세리 선배는 어렸을 때부터 항상 존경했다. 발자취를 따르는 건 커다란 일인데, 그의 업적에 가까워져 영광이다”고 말했다.
이번 우승으로 도쿄올림픽 출전 가능성도 한층 키웠다. 도쿄올림픽 여자 골프 출전권은 6월 말 발표할 세계 랭킹을 통해 확정된다. 세계 랭킹 15위 내에 선수 4명 이상 든 국가에선 상위 4명까지 올림픽 출전권이 주어진다. 29일 현재 세계 4위 박인비는 고진영(1위), 김세영(2위)에 이어 한국 선수 중 3위에 올라있다. 박인비는 “올림픽 시즌엔 더 잘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내 목표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