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열린 한·일전 0-3 완패에 대한 분노는 아직까지도 사라지지 않았다. 경기력에 대한 분노에 더해 벤투 감독을 구렁으로 몰아넣은 건 '불통'이었다. 명분 없는 한·일전 추진과 선수 차출 과정에서 드러난 독선 등 벤투 감독을 향한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벤투 감독은 이 위기를 돌파할 수 있을까.
2022 카타르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예선이 다가왔다. 오는 6월 3일 투르크메니스탄과 경기로 시작된다. 북한의 불참이 예고된 가운데 2차예선 모든 경기가 한국에서 열린다. 벤투 감독이 자신을 향한 불신을 반전시킬 수 있는 기회다. 좋은 경기력과 성적으로 2차예선을 통과한다면 분명 반전이 일어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벤투 감독의 선택지가 있다. 넓게 모두를 포용하면서 위기를 돌파하느냐. 아니면 A대표팀만 집중하며 위기에 맞서느냐. 갈림길이 나왔다. 벤투 감독의 선택에 따라 벤투 감독을 향한 신뢰의 깊이가 달라질 수 있다.
먼저 좋은 성적으로 2차예선을 통과한다면. 물론 박수받을 만한 일이다. 하지만 한국 축구 팬들의 인식은 '2차예선의 당연한 통과'다. 투르크메니스탄, 레바논, 스리랑카 등 객관적 전력에서 한국보다 현저히 떨어지는 팀들과 상대한다. 게다가 모두 홈 경기다.
이들에 승리를 거둔다는 건, 한국 축구에 있어서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들을 꺾었다고 해서 찬사가 터지지는 않는다. 이겨야 본전이란 말이다. 2018 러시아월드컵 2차 예선만 봐도 울리 슈틸리케 감독은 8전 전승으로 통과했다. 따라서 2차예선 통과가 벤투 감독의 신뢰 회복에 100%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렇기에 벤투 감독은 완전한 신뢰 회복을 위해서 더 크고, 넓게 봐야 한다. 이번 2차예선 기간은 올림픽대표팀의 소집기간과 겹친다. 2020 도쿄올림픽에 나설 최종엔트리를 선별할 수 있는 마지막 기간이다. 벤투 감독이 '불통'의 이미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셈이다. 한·일전 당시 올림픽대표팀의 주축 선수들을 대거 선발해 독선의 끝을 보여준 벤투 감독이었다.
이번에 올림픽대표팀을 위해 양보하고 배려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소통의 벤투 감독으로 거듭난다면, 그를 향한 시선은 달라질 수 있다. 이후 올림픽대표팀이 올림픽 본선에서 좋은 성과를 낸다면, 벤투 감독의 배려는 더욱 큰 찬사를 받을 수 있다.
또 감독으로서 새로운 경쟁력도 인정받을 수 있다. 사실 올림픽대표팀 주축 선수들 대부분은 A대표팀 주축이 아니다. 한·일전 당시에는 유럽파 다수가 빠졌기에 그런 현상이 벌어졌다. 이번 기회에 K리그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새로운 얼굴 발굴에 집중한다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다.
A대표팀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고, 새로운 스쿼드, 새로운 전술을 실험할 수 있다. 아시아 강호들이 전부 모이는 최종예선이 아닌 2차예선은 새로운 얼굴을 실험할 수 있는 최적의 무대이기도 하다. 최종예선 경쟁력을 위한 투자다. 배려와 새로운 실험 모두 잡으며 2차예선을 통과한다면 A대표팀에 올인해 통과한 것 보다 더욱 큰 가치를 품을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긍정적 기류가 흐르고 있다. 대한축구협회 관계자는 "벤투 감독과 김학범 감독이 만남을 가질 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좋은 분위기다. 이용수 부회장이 두 감독 모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또 기술위원회에서도 조정 역할을 할 것이다. 올림픽대표팀의 평가전 일정이 확정되면 본격적으로 소통에 들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김학범 감독은 "우리 선수 중 A대표팀에 대체 불가한 선수라면 개의치 않는다. 하지만 교체나 벤치에만 있다면 우리가 완전체로 준비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A대표팀에는 K리그를 비롯해 해외에 대체 가능한 자원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정중하게 요청하겠다"며 "이전까지 A대표팀이 부르면 다 오케이 했다. 이번에는 양보를 부탁드린다. 간절히 부탁드린다"고 호소한 바 있다.
이 간절한 목소리를 외면할 것인가. A대표팀 감독은 한국 축구 전체를 아우르는 지도자여야 한다. 오직 A대표팀에만 눈이 멀어, 연령별 대표팀을 외면한다면, 그는 A대표팀 감독의 자격이 없다. 한국 축구 전체 발전을 위해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권한을 침해받는 것이 아니다. 한국 축구 모두를 위한 최상위 대표팀 감독의 리더십을 표출하는 것이다. 존경받을 만한 장면이다.
벤투 감독이 그랬으면 한다. 그를 생각하면 차갑고 냉정한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실제로 그랬다. 지금 한국 축구는 '따뜻한' 벤투 감독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