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 이용규(36·키움)는 투수들이 상대하기 까다로워하는 타자다. 볼카운트가 불리해도 특유의 콘택트 능력을 앞세워 쉽게 물러나지 않는다. 타석에서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악착같이 투구 수를 늘린다. 그의 활약에 빗댄 '용규 놀이'는 이제 KBO리그 내 고유명사가 됐을 정도다.
지난 4일 수원 KT-키움전에선 묘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3회 KT 선발 오드리사머 데스파이네가 1루 땅볼을 친 뒤 1루로 뛰던 이용규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놀란 이용규가 데스파이네와 대치해 양 팀 더그아웃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경기 후 두 선수가 오해를 풀어 논란이 확대되진 않았지만 데스파이네가 흥분한 이유에 대한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했다. 그중 하나로 거론된 게 바로 '용규 놀이'였다.
당시 이용규는 무려 10구까지 가는 접전을 벌였다. 초구 스트라이크, 2구째 파울로 볼카운트가 몰렸지만 3구째와 4구째 볼을 골라낸 뒤 연거푸 파울 4개를 기록했다. 체인지업, 커브, 포심 패스트볼을 모두 걷어냈다. 이어 9구째 볼로 풀카운트를 만들었고 10구째 체인지업을 때려 1루 땅볼로 물러났다. 결과는 아웃이었지만 데스파이네 입장에선 심기가 불편할 수 있었다. 이용규는 이날 2회 첫 타석에서도 투구 수 6개를 끌어냈다. '용규 놀이'의 위력이 다시 한번 입증된 장면이었다.
이용규는 5일까지 시즌 타율이 0.276이다. 규정타석을 채운 54명 중 타격 34위. 출루율(0.395)은 15위로 상위권이다. 삼진(28개)보다 더 많은 볼넷(44개)을 골라냈다. 그 바탕에는 '용규 놀이'가 있다. 타석당 투구수(NP/PA)가 4.46개로 한화 정은원(4.54개)에 이어 리그에서 두 번째로 많다. 상대 투수에게 많은 공을 던지게 해 실투를 유발한다.
강병식 키움 타격코치는 "타격 기술적인 측면에서 콘택트 능력이 뛰어난 선수다. 스트라이크존에 대한 대응 능력이 뛰어나다. 끈질기게 승부하면 수비하는 입장에선 피곤할 수밖에 없다"며 "보통 투수들이 1이닝이 12~15구 정도를 던지는데 한 타자에게 10구 이상을 소모하면 투수 수가 확 올라간다. 그만큼 소화할 수 있는 이닝도 줄고 수비하는 시간이 길어져 수비수들의 피로감도 쌓인다"고 '용규 놀이'의 위력을 전했다.
이용규는 KBO리그 한 타자 상대 최다 투구 수 기록 보유자다. KIA 소속이던 2010년 8월 29일 광주 넥센전에서 박준수(현 KT 박승민 코치) 상대로 무려 20구를 던지게 했다. 파울만 무려 15개. 투구 수가 급격하게 늘어난 박준수는 후속 김선빈 타석 때 송신영과 교체됐다. 한화에서 뛰던 2015년 8월 22일 광주 KIA전에선 양현종 상대로 투구 수 17개를 끌어냈다. 역대 공동 2위 기록이다.
오윤 키움 타격코치는 "팬들이 '용규 놀이'라고 부르는 타격 모습은 집중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나온다. 이용규는 1구, 1구에 대한 집중력이 뛰어나고 콘택트 능력이 좋다. 끈질긴 승부를 하는 모습이 동료 선수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승부에 대한 투지를 불어 넣어주기도 한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용규는 지난 시즌이 끝난 뒤 한화 구단에서 방출됐다. 팀의 주장까지 맡아 선수단을 이끌었지만, 세대교체가 단행된 팀 쇄신 분위기가 맞물려 일자리를 잃었다. 30대 중반의 적지 않은 나이. 자칫 선수 생명이 끝날 수 있는 벼랑 끝에 몰렸지만, 가까스로 키움 유니폼을 입었다. 당시 김치현 키움 단장은 "풍부한 경험과 실력, 열정을 가진 선수와 함께해 매우 기쁘다. 연령대가 낮은 선수단에 실력 있는 베테랑의 합류로 뎁스(선수층)와 선수단 분위기가 강화되는 걸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용규는 공수에서 기대 이상의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입대한 임병욱의 빈자리를 채우며 주전 자리를 꿰찼다. 홍원기 키움 감독은 개막 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외야수고 경험이 매우 많은 베테랑이다. 영입했을 때 '그라운드에서 귀감이 될 수 있는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 있고 선수단을 이끌어갈 리더십도 있다'며 효과를 기대한다고 했는데 실제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만족감을 나타냈다.
베테랑 외야수는 그라운드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있다. 트레이드마크인 '용규 놀이'도 여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