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고양 실내체육관에서 만난 이승현(30·고양 오리온)은 ‘고양 수호신’이라 불린다. 내로라하는 장신 외국인 선수들이 덤벼드는 골 밑을 지켜온 그에게 강을준 감독이 붙여준 별명이다. 이승현은 "감독님은 우리 팀의 대장 아니신가. 대장이 그렇게 얘기해 주면 당연히 기분좋다"며 "한편으로는 책임감도 더 생긴다. 감독님 덕분에 동기 부여를 받고 있다"며 웃었다.
2014년 데뷔한 이승현은 리그를 대표하는 토종 빅맨 중 하나다. 그동안 많은 빅맨 유망주들이 프로 무대에서 외국인 선수의 벽을 넘지 못했다. 이승현은 달랐다. 특유의 파워로 신인 때부터 상대 외국인 선수를 마크하며 오리온의 골 밑을 지켰다. 부상 선수들의 이탈과 외국인 선수 미로슬라브 라둘리차가 부진으로 이탈한 올해는 그의 비중이 더 커졌다. 그가 2015~16시즌 이후 가장 긴 경기당 평균 34분 35초(4일 기준)를 뛰면서 '혹사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승현은 “사실 요즘은 체력 부담이 많이 줄어들었다”며 “신인 시절부터 우리 팀에는 빅맨 외국인이 별로 없었다. 내가 외국인 선수들을 전담 마크해야 했다. 이번 시즌에는 빅맨인 머피 할로웨이 선수가 있어 부담이 덜하다”고 했다. 그는 “수비 부담이 줄어든 대신에 공격과 수비 모두 활동량을 넓혔다”고 전했다. 긴 출장시간에도 그가 평균 득점(14.2점), 야투 성공률(49.3%), 자유투 성공률(91.5%) 모두 커리어하이를 기록하는 이유다.
2014년 데뷔 후 커리어 내내 기라성 같은 외국인 선수들을 상대해온 그가 뽑은 최고의 상대는 라건아(전주 KCC)다. 그는 “라건아는 답이 없다. 속공에 리바운드에 파워까지 ‘넘사벽’이다”라며 “그를 상대할 때는 손 뻗어서 방해하고 파울 받는게 최선이다. 자유투 하나라도 안 들어가면 성공”이라며 웃었다.
국내 대표 빅맨답게 이승현은 후배들에는 '넘어야 할 산'이다. 신인왕 후보로 꼽히는 하윤기(수원 KT)는 이승현과 첫 맞대결 후 “역시 두목 호랑이(이승현)는 다르다. 힘이 장난이 아니다”라고 떠올리기도 했다. 하윤기는 지난 12월 28일 이승현과 3라운드 맞대결을 펼친 후 “안 밀릴 수 있는 자신감이 생긴 것 같다”고 다시 한번 도전장을 던졌다.
후배의 도전에 이승현의 답은 진지했다. 이승현은 “윤기는 저보다 더 크게 될 선수”라면서도 “그래도 지는 해가 되고 싶지는 않다”고 응전했다. 그는 “은퇴하는 날까지 모든 후배가 내 라이벌이다. 후배들의 발판이 되지 않겠다”며 “계속 어려운 상대로 남고 싶다. 코트에서 상대로 만나는 이상 지고 싶지 않은 게 제 승부욕”이라고 했다.
이승현은 ‘골 밑은 전쟁터”라고 묘사했다. 그 전쟁터에서 이승현을 살아남게 한 무기는 슛, 그리고 투지다. 그는 “하드웨어만 좋다고 프로에서 성공할 수 없다”며 “농구 기술 한 가지만큼은 장착해야 한다. 난 수비와 미드레인지 슛 덕분에 지금까지 버텼고 더 발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승현은 “한 가지 더, 골 밑은 몸싸움이 일어나는 전쟁터다. 밀리지 않으려면 투지와 근성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나보고 힘이 좋다고들 하는데, 힘이란 건 결국 상대에게 밀리지 않고 파이팅 있게 플레이하는 투지의 결과물”이라고 했다.
그는 궂은일을 도맡아 하고 벅찬 상대와 붙으며 커리어를 보냈다. 개인 성적이 아주 화려하진 않지만, 농구팬들은 이승현에게는 '기록으로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고 치켜세운다. 이승현은 “마음가짐이랄까. 경기를 하면 항상 모든 동료를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부터 든다”며 “성격 자체가 그렇다. 엄마 같은 캐릭터라고 해야 하나”며 웃었다.
올 시즌을 마치면 이승현은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는다. 하지만 그는 “주변에서 FA 얘기를 많이 하지만 시즌 끝날 때까지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겠다”며 “농구를 오래 하긴 했구나는 생각만 들더라. 지금은 오리온이 어떻게 하면 이겨서 더 올라갈 수 있을까 생각만 한다”고 밝혔다.
시즌 반환점을 돈 이승현의 제1 목표는 전 경기 출장이다. 그는 “신인 때 빼고 54경기를 다 뛴 적이 없더라”며 “54라는 숫자는 전 시즌을 잘 치렀다는 증거다. 부상 없이 끝까지 마무리하고 싶다”고 다짐했다. 그는 이어 “개인 기록 욕심도 물론 있다”라며 “시즌이 끝났을 때 팬들께서 시즌을 되돌아본 후 '이승현이 이번 시즌 업그레이드가 됐구나' 하고 떠올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