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종훈(54)은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40홈런 타자다. 1991, 92년 정규시즌 최우수선수로 선정됐고, 3년 연속(1990~92년) 홈런·타점왕에 올랐다. 유격수와 1루수로 두 차례씩, 지명타자로 한 차례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그런데도 13세 야구선수들에게는 스타가 아니다. 제주에 마련된 KBO 넥스트 레벨(Next Level) 트레이닝 캠프에서 총괄 감독을 맡고 있는 그는 “요즘 선수들에게는 이정후(키움 히어로즈)와 강백호(KT 위즈)가 최고 스타”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장 감독 앞에서 호쾌한 스윙을 하던 초등학생 강하경(13·진주시 리틀) 군에게 “그럼 이종범이 누군지는 아냐”고 물었다. 강 군은 “그분은 안다”고 대답했다. 이유는 짐작했던 대로다. “이정후 선수 아빠라서”다. 그래도 장 감독은 “내가 누군지 모르면 어떤가. 어린 선수들의 야구 열정에 매일 감동하고 있다”고 했다.
KBO리그는 지난해 큰 고비를 맞았다. 일부 선수가 코로나19 방역 수칙을 어겨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았다. 한국 야구대표팀은 13년 만에 야심차게 출격한 도쿄올림픽에서 메달을 따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대중은 국제 경쟁력을 잃은 프로야구를 향해 싸늘한 시선을 보냈고, 야구 인기는 시들해졌다.
KBO 넥스트 레벨 트레이닝 캠프는 이런 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대책 중 하나다. 지난 10일 제주 서귀포시에서 시작한 1차 캠프에는 리틀야구 국가대표 상비군 선수 44명이 참가하고 있다. 오는 24일까지 필드 훈련과 피지컬 트레이닝, 바이오 메커닉스 측정을 통해 기본기를 다지고 미래를 준비한다. 다음 달 7일부터 25일까지는 고교 입학 예정인 중3 우수 선수 40명을 대상으로 2차 캠프를 진행한다. KBO리그 대표 레전드인 장 감독은 2개월 동안 이 유망주들을 살피고 이끌어야 할 중책을 맡았다.
KBO리그 역대 최고 홈런 타자이자 현재 방송 해설위원으로 일하는 이승엽(45)은 어깨가 무거운 장 감독을 돕기 위해 제주에 왔다. 이 위원은 역대 한 시즌 최다 홈런(2003년 56개)과 통산 최다 홈런(626개) 기록을 모두 보유한 ‘홈런의 대명사’다. 18일 저녁 리틀야구 선수들에게 ‘야구선수의 꿈’을 주제로 강연했고, 19일엔 필드 훈련장을 찾아 원포인트 레슨을 했다. 이 위원은 “내가 이 선수들 나이일 때, 삼성 라이온즈 코치님들과 이만수 선배님이 학교에 오셔서 같이 야구를 한 기억이 있다”며 “40년 가까이 지났지만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좋은 추억이다. 이 친구들에게도 그런 시간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40홈런 시대’를 연 우타 홈런왕 장종훈과 ‘50홈런 시대’의 주역인 좌타 홈런왕 이승엽이 타석에서 마주 선 모습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명장면이었다. 과거 그라운드 바깥에선 만나지 못했던 장 감독과 이 위원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반가워했다. 이 위원은 “어린 선수를 지도하러 왔지만, 사실 장종훈 선배님을 만난다는 생각에 설렜다. 어렸을 때 만화 캐릭터(‘홈런왕 왕종훈’)로 나오셨던 분이고, 야구선수로서 늘 동경하던 분”이라며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한 뒤, 선배님의 홈런 기록을 목표 삼아 달렸다. 대선배님이 유망주 육성을 위해 고생하시는 데 대해 야구인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 인사를 드린다”고 했다. 장 감독도 “이승엽 위원과 이렇게 경기장 밖에서 만난 건 처음인데 나야말로 정말 영광이다. 내 기록이 갑자기 초라해질 정도”라며 “이 위원이 와준 덕에 어린 선수들에게 더 뜻깊은 시간이 될 것 같다”고 화답했다.
장종훈 감독과 이승엽 위원은 야구 꿈나무들에게 “이기는 기술보다 기본기와 인성이 먼저”라는 걸 알려주고 싶다고 했다. 장 감독은 “어린 선수들 실력이 기대 이상이라 미래가 밝다고 느꼈다. 나와 코치들 모두 잔기술보다 기본기를 확실히 다지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며 “야구를 잘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좋은 인성을 갖고 올바르게 성장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본다. 이 친구들이 잘 자라서 한국 야구를 더 좋은 길로 이끌 대들보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이 위원도 “프로야구 선수 이전에 좋은 사람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아직은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한 나이다. 부상 없이, 친구들과 잘 지내면서 훈련을 충실히 소화하는 과정에 더 집중했으면 좋겠다”며 “진정한 승부를 봐야 할 시기는 5년 뒤, 10년 뒤에 온다. 지금은 기본기를 다지면서 자신의 인생을 중요하게 여기고, 학생다운 학생으로서 미래를 준비하는 시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프로야구 레전드들의 생생한 조언은 미래의 스타에게 최고의 자양분이다. 투수 조현태(인천서구 리틀)군은 “지금은 실패해도 된다는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며 “우리 나이 때는 안타나 홈런을 많이 맞아도 된다고, 그게 다 좋은 선수가 되는 과정이라고 하셨다”고 전했다. KBO의 ‘넥스트 레벨’을 보여줄 꿈나무들은 그렇게 야구와 인생의 이치를 함께 배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