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층에 달하는 아크로 서울 포레스트 조감도. DL이앤씨 제공
최근 초고층 아파트에서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지만, 일부 아파트 재건축 조합은 한층이라도 더 높은 아파트와 빌딩을 지어달라며 아우성이다. 대형 건설사는 이런 분위기에 발맞춰 초고층 아파트 설계안을 들이밀며 기술 자랑과 함께 조합 환심 따기에 급급한 모습이다.
사건·사고 중심선 고층아파트 GS건설은 최근 서울 용산구 한강맨션 아파트 재건축 시공사로 선정됐다. 이로써 한강맨션은 재건축사업을 통해 지하 3층·지상 35층, 15개 동, 1441가구 규모로 탈바꿈할 전망이다.
그런데 GS건설은 입찰 과정에서 한강맨션을 68층까지 올리는 별도의 설계안을 조합 측에 제시해 눈길을 끌었다. 오세훈 서울 시장이 한강 변 35층 높이 제한 완화를 시사하자 종전 서울시에서 인가받은 35층 설계안과 별도의 안을 제안한 것이다. 한강맨션이 68층으로 지어지면, 한강 변 아파트 중 가장 높은 아파트 타이틀을 갖게 된다.
업계 관계자는 "용산은 떠오르는 부촌이다. 이곳을 수주하려고 주요 건설사들이 달려들었다. (GS건설이) 68층 설계안을 따로 낸 것도 조합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국토교통부의 '2019 전국 건축물 현황 통계' 자료를 보면 전국 건축물 724만3472동 중 30층 이상 건축물은 2739동(0.03%)이었다. 그러나 국토부가 2019년 발표한 '전국 건축 인허가 현황'에 따르면 2014~2018년까지 30층 이상 고층 건축물은 수도권을 중심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특히 2014년과 2015년에는 전년 대비 각각 111.7%와 130.2%의 증감률을 기록할 정도로 붐이었다.
높은 아파트는 보통 그 지역의 '랜드마크'로 통한다. 그만큼 집값 오름폭이 크고 분양 시장에서도 인기다. 일부 재건축 조합에서 초고층을 지어달라고 압력을 넣고, 건설사가 부응하는 이유다.
하지만 높은 아파트는 사건·사고도 잘 난다. 당장 최근 붕괴 참사가 난 '광주 화정 아이파크'는 39층이었다. 지난달 12일 소방관이 직접 소화기를 들고 꼭대기 층까지 올라가 화재를 진압한 강원 춘천시 소재 신축 아파트도 49층에 달한다. 하루 뒤인 13일 강풍으로 거푸집이 엿가락처럼 휜 사고가 난 '중흥S-클래스 에듀포레'는 지방에서 보기 드문 25층 규모였다. 최근 공진 현상으로 입길에 오른 '아크로 서울포레스트' 역시 49층이다.
부산 해운대의 초고층 아파트에 거주 중인 A 씨는 "다들 수십층 아파트가 좋다고 해서 들어왔지만, 실거주 측면에서는 좋은지 솔직히 모르겠다. 매년 태풍이 올 때마다 혹여 유리창이 깨지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고 털어놨다. 이 아파트는 몇 년 전 태풍 '마이삭'과 '하이선'이 연달아 왔을 때 유리창이 수십 개씩 깨져 논란이 됐다.
101층 초고층 주상복합 건물인 부산 해운대 엘시티. 연합뉴스
모호한 건축법 손질해야 전문가들은 현행 건축법 규정의 모호함 때문에 고층 아파트에서 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고 지적한다.
건축법 시행령 제2조 제18항은 30층 이상인 건물은 준초고층, 50층 이상인 건축물을 초고층으로 규정한다. 50층 이상 아파트는 '초고층재난관리법'에 따라 사전재난영향성검토, 재난예방·피해경감계획 등 40여 가지 까다로운 심의를 통과해야 한다. 아크로 서울포레스트, 이천 센트레빌 레이크뷰, 더샵 송도아크베이 등 신축 주상복합단지가 모두 49층에서 멈춰선 이유다.
이명식 동국대 건축공학부 교수는 "초고층인 50층부터 여러 규제를 적용받게 되자, 각 건설사와 조합이 이를 피하기 위해 49층 미만으로 아파트를 짓고 있다"고 꼬집었다. 사실상 사전 재난재해 검토를 받아야 하는 고층 아파트인데도 이를 교묘히 빠져가는 곳이 많다 보니 각종 안전사고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2일 오전 8시 7분께 광주 서구 화정아이파크 붕괴 건물에 매달려 있던 25t 규모의 대형 콘크리트 구조물이 아래로 떨어졌다. 사진은 지난 29일 기울어진 채 매달려 있던 콘크리트 구조물의 모습(사진 왼쪽)과 이날 이 구조물이 떨어져 일부가 건물에 걸쳐 있는 모습. 연합뉴스
한국초고층도시건축학회 회장이기도 한 이 교수는 "외국에서는 초고층 규정을 단순히 층수로만 끊지 않고, 면적과 높이, 용도 및 다중이용시설의 안전 등의 여러 사안을 복합적으로 따져서 결정한다"며 "초고층 아파트 사고를 줄이기 위해서는 법 규정과 정의를 바로 잡도록 제도적 접근부터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제는 아파트는 높이가 아니라 안에 담는 질로 승부를 봐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두바이 등 초고층 건물을 많이 짓는 외국의 경우 초고층 건물을 짓기 위해 최첨단 공법과 기술, 안전, 시스템 전문가를 끌어모아 '스마트 빌딩'을 짓는다.
이 교수는 "단순히 키만 큰 랜드마크 건물은 금방 탄로가 난다. 초고층이 도시의 아이콘이 되던 시대는 끝났다"며 "건물의 층수는 무조건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 복합적 검토 끝에 결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지영 기자 seo.jiyeo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