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그룹이 바이오 사업을 신성장동력으로 결정했다. 롯데제약 시절 실패를 경험해서인지 이번에는 물량공세로 성과를 낼 수 있는 바이오 위탁개발생산(CDMO) 분야를 전략적으로 선택했다.
삼바·후지필름 선례 쫓는 신동빈
16일 업계에 따르면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직접 주요 먹거리로 꼽은 바이오 사업을 영위하는 롯데바이오로직스 법인이 이달 말 신설된다. 롯데지주 산하의 자회사인 롯데바이오로직스는 바이오 의약품 사업을 주도하며 메타버스(3D 가상세계)·모빌리티 등과 함께 그룹 미래 먹거리의 한 축을 담당할 전망이다.
지난 4월 신동빈 회장은 바이오 사업과 관련해 미국 출장을 다녀올 정도로 각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신 회장은 미국 뉴욕주 시러큐스시에 위치한 브리스톨 마이어스 스큅(BMS)의 바이오 의약품 생산공장을 직접 둘러봤다. 이를 바탕으로 롯데는 지난 13일 이사회에서 1억6000만 달러(약 2000억 원) 규모의 BMS 생산공장 인수를 의결했다. BMS는 2021년 기준으로 CDMO 글로벌 시장 톱10에 드는 규모를 가진 바이오 업체다.
신동빈 회장은 “BMS 시러큐스 공장의 우수한 시설과 풍부한 인적자원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 지속적인 투자를 바탕으로 롯데와 시너지를 만들어 바이오 CDMO 시장에서 빠르게 자리잡기를 바란다”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롯데는 그룹 차원에서 바이오 사업을 키웠던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선례를 쫓고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지난 2020년 창립 9년 만에 매출 1조 원을 돌파하는 등 세계적인 바이오 기업으로 성장했다.
또 일본 경제를 꿰고 이는 신 회장에게 후지필름의 선례도 바이오 사업 진출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후지필름은 기존 핵심 사업이었던 칼라필름의 시장규모가 감소하자 신사업을 모색했고, 정밀화학기술을 바탕으로 바이오 사업에 뛰어들었다. 후발주자였던 후지필름은 적극적인 인수합병(M&A)으로 바이오 의약품 사업에 돌입했다.
2011년 미국 머크로부터 CDMO 사업을 담당하는 다이오신스 바이오테크놀로지를 인수했다. 이어 2014년 백신 생산 역량 확보와 CDMO 사업 확장을 위해 케이론 바이오테라퓨틱스 지분을 사들였다. 2019년에는 대량생산역량 확보를 위해 1조 원 이상 규모의 바이오젠 덴마크 바이오공장을 매입하며 글로벌 CDMO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2030년 글로벌 톱10'…공격적 투자가 관건
롯데는 10년 간 2조5000억 원을 투자해 2030년 글로벌 톱10 CDMO 기업으로 도약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롯데가 이번에 인수한 시러큐스 BMS 공장은 3만5000ℓ의 항체 의약품 생산이 가능한 규모다. 향후 롯데는 미국 법인 설립과 10만ℓ 이상 규모의 생산공장 건설도 계획하고 있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아직 법인이 설립되지 않아 세부적인 내용을 밝힐 수 없다. 하지만 10만ℓ 공장 설립과 관련한 구체적인 계획이 세워진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3만5000ℓ는 삼성바이오로직스의 1공장 3만ℓ와 비슷한 규모다. 2013년 1공장 가동을 시작했던 삼성바이오로직스는 2023년까지 62만ℓ라는 세계 최대 규모의 바이오 의약품 시설을 확보한 기업으로 성장했다.
앞으로 지속적인 투자가 동반된다면 롯데의 글로벌 톱10 CDMO 기업으로 도약도 불가능한 꿈이 아니다. 하지만 롯데가 약속한 2조5000억 원의 투자금액은 바이오 의약품 시장에서는 그리 크지 않은 규모다. 삼성바이오로직스의 경우 4공장까지 공장 건설에만 3조6400억 원을 쏟아부었다.
후지필름의 경우 바이오젠 덴마크 공장 인수와 추가 투자에만 2조 원 이상을 집행했다. 이런 공격적이고 과감한 투자로 인해 삼성바이오로직스와 후지필름은 2025년 CDMO 생산용량(동물세포 기반) 규모에서 각각 2위와 5위(바이오프로세스 인터내셔널의 분석 자료)에 오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프로스트앤설리번에 따르면 글로벌 CDMO 시장은 2021년 128억 달러(약 16조4000만 원)에서 매년 10% 정도 성장해 2026년 203억1000만 달러(약 24조 원)까지 커질 전망이다. 영업이익률이 20~30%로 높고, 성장성도 기대되고 있는 시장이라 기존 제약·바이오 기업뿐 아니라 대기업들도 너도나도 뛰어들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대기업들의 진입에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다. 삼성바이오로직스와 셀트리온의 창립 때만 하더라도 ‘만만치 않을 텐데, 제대로 하겠어’라는 의구심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삼성과 SK 등이 성공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오랜 기간이 소요되는 신약 개발이 아닌 물량공세로 성과를 낼 수 있는 CDMO 시장을 공략하는 전략은 앞으로의 투자 여력에 따라서 성공 여부가 결정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