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즈키 이치로(49·일본)는 선수 시절 독특한 '루틴(Routine·습관)'이 있었다. 한동안 아침 식사로 카레만 매일 먹었다. "음식이 바뀌면 컨디션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철두철미한 그의 성격은 미국 메이저리그(MLB)에서 3089안타를 기록한 원동력이었다. 선수들의 루틴은 종목을 가리지 않는다. 테니스 스타 라파엘 나달은 경기 전 생수병(페트병)을 세워놓고 상표가 코트 쪽을 향하게 한다. SSG 랜더스 투수 박종훈은 스파이크를 신을 때 항상 왼쪽부터 신는다.
루틴은 일종의 '강박'이다. 자칫 병적으로 보일 수 있는 행동이지만 선수들은 이를 통해 심리적 안정을 느낀다. KBO리그 4년 차 외국인 투수 드류 루친스키(34·NC 다이노스)도 마찬가지다. 루친스키는 자타공인 '루틴의 왕'이다. 그의 루틴은 특정 행동이 아닌 일과. 시간 관리를 철저하게 했던 독일의 철학자 칸트처럼 하루 일정을 세분화해 빼곡하게 소화한다. 강인권 NC 감독 대행은 "루친스키의 준비 과정은 완벽하다. 다른 선수들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라며 "루틴을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열심히 하는 것 같다. 그 덕분에 부상도 없고 그만큼 좋은 공을 던질 수 있다"고 말했다.
루친스키의 루틴은 성적으로 연결된다. 첫해 9승을 시작으로 2020년 19승, 지난해 15승을 따냈다. 이 기간 KBO리그에서 가장 많은 43승을 거뒀다. 올 시즌에도 5승 4패 평균자책점 1.85(13일 기준)로 순항 중이다. 지난 7일 '리그 평균자책점 1위' 김광현(SSG), 12일 외국인 에이스 데이비드 뷰캐넌(삼성 라이온즈)과의 맞대결에서 모두 판정승을 거뒀다. 루친스키는 어떻게 등판을 준비할까. '마운드의 칸트' 루친스키의 루틴(5일 휴식 기준)을 따라가봤다.
◇등판 당일
루친스키는 "최대한 정해진 루틴에 맞춰 진행할 수 있게 집중한다"고 했다. 오후 3시 야구장에 도착해 간단하게 몸을 푼다. 오후 4시 식사한 뒤 오후 5시 10분 간단하게 마사지를 받는다. 오후 5시 45분에는 제이밴드(손목에 밴드를 차고 하는 튜빙 운동)로 5분 정도 워밍업을 한다. 오후 6시 캐치볼 및 불펜으로 몸을 풀고 마운드에 오른다.
등판 이후에는 해비 웨이트 트레이닝에 집중한다. 등판 직후 아드레날린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면 강도 높은 훈련이 가능하다. 에너지를 완전히 소진하면 다음 등판까지 회복에 포커스를 맞춘다.
◇다음날
등판 다음 날 집중하는 건 드라이브라인 훈련이다. 오후 1시 30분 1시간을 하고, 오후 3시 40분 회복 훈련을 겸해 15분을 더한다. 드라이브라인은 미국 워싱턴주에 있는 야구 아카데미로 루친스키는 드라이브라인 훈련 프로그램을 사비로 샀다. 주로 무게가 다른 웨이티드공을 던지면서 땀을 뺀다. 몸에 쌓여 있는 노폐물을 배출하고 회복하는 과정을 만든다.
오후 4시 식사, 오후 5시에는 어깨 및 상체 위주로 마사지를 받는다. 바로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30분 동안 사우나를 한다. 루친스키는 "다른 선수들과 어떻게 차별화할지 고민했다. 특별하고 새로운 훈련 방법을 찾다가 드라이브라인을 접하게 됐다"며 "처음에는 나와 잘 맞지 않았는데 조금씩 변형하면서 조절했다. 꾸준히 연구하고 노력해야 조금씩 성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튿날
유일하게 불펜 피칭을 하는 날이다. 낮 12시 30분 야구장에 도착해 가볍게 몸을 푼다. 오후 1시 30분부터 각각 30분 동안 드라이브라인 훈련과 스트레칭을 한다.
오후 2시 30분 캐치볼을 시작해 워밍업이 끝나면 오후 2시 50분 불펜피칭(15~20구)에 들어간다. 구종을 한 번씩 테스트하면서 경기 감각을 유지하는 데 중점을 둔다. 이어 러닝 20분, 드라이브라인 회복 훈련 15분에 전신 운동까지 한다. 러닝은 체내 피로물질인 젖산을 빼내는 데 효과적이다. 오후 5시 식사, 오후 6시에는 하체 마사지를 받는다.
◇사흘째
캐치볼과 러닝은 제외한다. 공을 최대한 만지지 않으면서 팔을 회복하는 데 집중한다. 추가로 하는 건 코어 벨로시티 운동이다. 밴드를 허리에 차고 저항운동을 하는 게 핵심. 골반 회전을 점검하고 보강한다. 오후 2시 스트레칭 30분, 오후 2시 30분 드라이브라인 회복 훈련 15분에 이어 코어 벨로시티 훈련에만 1시간을 할애한다. 이후 마사지,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사우나로 훈련을 마무리한다.
박래찬 NC 수석 트레이너는 "루친스키는 드라이브라인(웨이티드볼), 코어 벨로시티 훈련의 경우 투구 메카닉에 맞게 공부해서 본인만의 훈련 방법을 만들었다. 모든 프로그램을 직접 해보면서 훈련 방법을 정립해 루틴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나흘째
평지에서 캐치볼을 하며 투구 밸런스를 재정비한다. 낮 12시 45분부터 가볍게 45분 정도 몸을 푼다. 이어 드라이브라인(30분)과 스트레칭(30분)으로 몸을 예열한 뒤 오후 2시 30분부터 20분 동안 캐치볼을 한다. 몸에 부담이 가지 않을 정도로 공을 던진다. 캐치볼 뒤 러닝(20분)→드라이브라인 회복 훈련(15분)→메디신볼 훈련(15분)으로 컨디션을 체크한다. 오후 3시 40분 식사, 오후 5시에는 30분의 냉·온탕 사우나로 피로를 해소한다.
◇닷새째(등판 전날)
오후 1시 30분부터 드라이브라인(30분)→스트레칭(30분)→캐치볼(20분)→러닝(20분)→드라이브라인 회복 훈련(15분)까지 빠짐없이 소화한다. 이날 가장 중요한 건 다음날 상대할 타자들에 대한 분석이다. 무리한 운동은 하지 않고 오후 6시 30분부터 상대 팀 전력분석에 들어간다.
루친스키는 "루틴을 지키는 데 가장 중요한 건 마음가짐"이라고 했다. 그는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루틴을 지켜나간다. 나도 사람이니까 놀고 싶고, 쉬고 싶을 때가 있지만 철저하게 준비하면 등판 결과에 후회를 남기지 않을 수 있다. 그 생각으로 다음 등판을 위한 루틴을 지킨다"며 "열심히 하는 동료들에게 모범이 되고 싶고 승리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