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패션을 이끌어가는 삼성물산 패션 부문이 거대한 편집숍으로 전락했다. 자체 브랜드를 키우기보다는 해외 브랜드의 판권을 사들여 국내에 되파는가 하면,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66년간 이어진 직물 사업도 철수한다. 패션업계는 삼성물산이 수익성에 함몰된 나머지 패션 대기업으로서 책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공룡 편집숍된 삼성물산
"설마, 삼성물산이 빈폴까지 접지는 않을 거예요."
지난 5월 서울 시내 한 백화점에서 만난 '빈폴' 매장의 한 관계자가 손사래를 쳤다. "삼성물산이 요즘 철수하는 자체 브랜드가 많던데, 빈폴은 괜찮은 거냐"는 질문에 돌아온 답이다. 이 관계자는 "듣기로는 수익성 때문에 삼성물산이 (자체 브랜드를) 안 한다고 알고 있다. 아쉽긴 하지만 해외 브랜드 판권을 사들여서 파는 편이 더 이익이 남아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삼성물산은 2016년부터 브랜드 구조조정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 무렵 남성복 '엠비오', 잡화 브랜드 '라베노바' 사업을 정리했다. 이후 삼성의 대표 브랜드 '빈폴 스포츠', '로가디스 컬렉션' 등이 차례로 문을 닫았다.
철수하는 자체 브랜드는 늘어가는 반면 출시 소식은 극히 드물다. 삼성물산 패션 부문은 지난해 중저가 여성 데일리웨어 브랜드 ‘코텔로’를 선보였다. 삼성물산이 수입 브랜드가 아닌 자사 제작 브랜드를 선보인 건 2012년 '에잇세컨즈' 이후 9년 만의 일이었다.
반면 해외 수입 브랜드 판권은 부지런히 사들이고 있다. 최근 '신명품'으로 떠오른 '아미' '톰브라운' '메종키츠네' '르메르'는 모두 삼성물산 패션 부문이 판권을 갖고 있다. 현재 삼성물산 패션 부문이 전개하는 자체 브랜드는 '빈폴'과 '르베이지', '에잇세컨즈' '코텔로' 등으로 수입 브랜드와 비슷한 수준이다. 회사가 벌이는 마케팅 비중은 수입 브랜드에 더 무게가 실렸다.
신명품을 수입해 판다고 해서 큰 이문을 남기는 것도 아니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물산 측은 아미와 메종키츠네의 판권 계약을 3~5년 단위로 갱신 중인데, 완제품을 수입해 나르는 수준이기 때문에 마진율도 낮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삼성물산 패션 부문의 지난해 영업이익률은 5.6%로 경쟁사인 한섬(10.9%), 신세계인터내셔날(6.2%) 등과도 차이가 난다.
일부에서 삼성물산 패션 부문이 거대한 편집숍으로 전락했다는 비판도 흘러나온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 일대에는 해외 브랜드를 직수입해 판매하는 멀티숍과 편집숍이 다수 모여있다. 이들 매장은 될성부른 해외 브랜드를 찾아내 직접 바잉을 하거나 판권 계약을 맺는 경우도 적지 않다.
삼성물산 패션 부문은 콘셉트 스토어 ‘10 꼬르소 꼬모 서울’과 '비이커'를 운영 중이다. 이들 매장은 사실상 자체 브랜드보다는 해외 수입 브랜드 판매 및 소개 통로로 쓰이는 것이 사실이다.
신명품을 찾는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는 해외 직구에 익숙하다. '발란' '머스트잇' 등 온라인 명품 플랫폼이 늘어날수록 삼성물산 패션 부문의 운신 폭도 좁아질 수밖에 없다.
직물사업도 철수…패션 대기업 책무 '물음표'
삼성물산 패션 부문은 그룹의 모태로 불리는 양복 원단을 만드는 직물사업도 털어냈다.
직물 사업은 삼성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이 1956년 섬유 국산화를 선언하며 대구에 제일모직을 세우고 원단을 생산하며 시작됐다. 그룹의 출발 선상에 있는 사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삼성물산 패션 부문은 오는 11월 말을 끝으로 경북 구미 공장을 문 닫는다고 밝혔다. 구미 공장은 현재 삼성물산 패션 부문이 국내에서 유일하게 원단을 생산하는 곳이다. 삼성물산 패션 부문 측은 66년 만의 직물사업 철수 이유로 국내 인건비 상승으로 인한 해외 원단과의 가격 경쟁 실패를 꼽았다.
15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삼성물산 패션 부문의 올해 1분기 영업이익은 420억원이었다. 삼성물산 패션 부문은 지난해 영업이익 1000억원을 기록하면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올해는 1분기 만에 50% 수준의 이익을 얻은 셈이다.
내부적으로 분위기도 좋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물산 패션 부문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직원들에게 성과급을 나눠줬다. 이른바 '돈은 안 되는데 피곤한' 사업은 접거나 전개 자체를 하지 않고, 비교적 실패 리스크가 적고 성공 가능성이 큰 브랜드만 수입한 결과다.
패션 업체 A 사 관계자는 "기업이 수익을 좇고, 해외 브랜드 판권을 사들여오는 일이 불법은 아니다. 이것이 한국 패션 기업의 현주소 아닐까"라며 "다만 최근 삼성물산 패션 부문의 행보를 보면 아주 아쉽다. 이 기업이 패션 분야에서 뚜렷한 위치가 있고, 마땅히 해줘야 할 책무가 분명한 곳이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