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현지시간) 열린 윔블던 테니스대회 남자 단식 결승전의 승자는 노박 조코비치(세르비아)였다. 그는 2018, 2019, (2020 대회는 코로나 때문에 열리지 않음) 2021년에 이어 윔블던 남자 단식에서 4회 연속 우승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로써 조코비치는 메이저 대회(호주오픈, 프랑스오픈, 윔블던, US오픈)에서만 21회 우승하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그보다 메이저 대회에서 더 많이 우승한 선수는 라파엘 나달(22회)밖에 없다. 한편 올해 처음 도입된 윔블던 14세부 경기 남자 단식 챔피언에는 한국 테니스의 기대주 조세혁이 올랐다.
14일간 진행된 2022 윔블던 대회는 다양한 이야기와 화제를 만들었다. 필자는 올드팬의 향수를 자극할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장손으로 왕위 계승 서열 2위인 윌리엄 왕세손과 그의 부인 케이트 미들턴 왕세손비는 열렬한 테니스 팬이다. 윔블던 대회의 낯익은 풍경 중 하나가 윌리엄과 케이트가 직관하는 모습이다. 이 부부는 2022 윔블던 남자 단식 결승전에 뜻밖의 손님을 대동해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들의 장남이자 왕위 계승 서열 3위로 아홉 번째 생일을 며칠 남겨 놓지 않은 조지 왕자가 깜짝 등장한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테니스 대회이자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윔블던은 엄격한 드레스 코드로도 유명하다. 대회에 참가한 모든 선수가 착용한 옷, 모자, 밴드, 신발 등은 흰색이어야 한다.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이 드레스 코드는 2014년에 도리어 강화되어, 선수들은 언더웨어마저도 흰색만을 입어야 한다.
흥미로운 점은 윔블던의 드레스 코드는 관람객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주요 경기가 열리는 센터 코트와 1번 코트에서 경기를 관람하려면 일반 관객도 말쑥하게 차려입는 게 좋다. 또한 앰부시 마케팅(스폰서가 아니면서도 그러한 인상을 줘 홍보를 극대화하는 기법) 규제에 따라, 관객은 기업의 로고가 크게 들어간 옷을 입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윔블던의 센터 코트에는 1922년 만들어져 74개의 좌석으로 운영되는 로얄 박스가 있다. 초청장을 받은 유명 인사만이 앉을 수 있는 이곳에는 더욱 엄격한 드레스 코드가 적용된다. 남성은 정장 차림에 타이를 반드시 매야 한다. 역시 정장을 입어야 하는 여성은 햇빛을 가리기 위해 모자를 쓸 수도 없다. 다른 관객의 시야를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10일 결승전에 모습을 보인 조지 왕자도 규정에 따라 정장을 입었다. 하지만 아홉 살이 채 안 된 어린 왕자가 정장 차림으로 3시간이 넘게 경기를 지켜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런던 날씨답지 않게 그날 기온은 섭씨 29도까지 올랐다고 한다. 이에 타이를 맨 조지 왕자는 부모에게 “too hot(너무 덥다)”고 말하며 이마의 땀을 연신 닦았다.
경기 후 이들은 윔블던 챔피언 조코비치와 만나 담소를 나눴다. 조코비치는 조지 왕자에게 우승 트로피를 들어보라고 건네주었고, 이에 왕자는 쑥스럽게 이를 들어 올렸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윌리엄 왕세손이 조지에게 “Don't drop it(트로피 떨어뜨리지 마)”라는 농담을 던졌다는 유쾌한 일화도 전해졌다.
사실 조지 왕자의 이날 윔블던 데뷔가 언론과 대중의 시선을 끈 데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었다. 1991년 당시 아홉 살이었던 윌리엄 왕자가 어머니인 다이애나와 여자 단식 결승전을 보며 윔블던 무대에 데뷔했던 장면이 연상됐기 때문이다. 31년의 시차를 두고 거의 같은 나이의 두 왕자가 윔블던에 데뷔한 모습, 그리고 아직은 약간 어색하지만, 정장을 입은 앳된 모습의 두 왕자가 너무 비슷해 보여 화제를 모았다.
다이애나가 찰스 왕세자와 ‘세기의 결혼식’을 올릴 때, 그녀의 나이는 불과 스무 살이었다. 그녀의 결혼 생활은 평탄치 않았다. 남편 찰스의 마음은 딴 사람에게 이미 가 있었고, 가식적이고 체면만 내세우는 왕족들 사이에서 다이애나는 불행했다.
그런 그녀에게 아들 윌리엄과 해리는 보물 같은 존재였다. 부모의 불화와 이혼 등으로 외롭게 자랐던 다이애나는 이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두 아들을 사랑과 정성을 다해 키웠다. 장난을 좋아하고 잘 웃는 다이애나는 윌리엄에게 “You can be as naughty as you want, just don’t get caught(원하는 만큼 장난쳐도 되지만, 들키지는 마)”라고 말할 정도로, 그녀는 아들에게 특별한 친구 같은 존재였다.
다이애나는 왕세자비의 의무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녀는 왕족이라는 특권 의식을 내려놓고, 소탈하고 진심 어린 마음과 행동으로 국민을 대했다. 이에 다이애나는 영국민들로부터 ‘People's Princess(국민의 왕세자비)’로 불릴 만큼 사랑과 존경을 받게 된다.
두 아들을 위해 불행했던 결혼 생활을 15년간 지속했던 다이애나는 결국 1996년 8월 찰스와 이혼했다. 불과 1년 후 그녀는 프랑스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어머니 다이애나를 향한 윌리엄의 사랑은 여러 곳에서 드러난다. 윌리엄은 어머니로부터 선물로 받은 낡은 오메가 손목시계를 지금도 거의 매일 찬다. 윌리엄은 매년 ‘어머니의 날’을 맞이할 때마다 그의 세 자녀(조지, 샬럿, 루이)에게 할머니 다이애나를 향해 편지를 쓰게 한다고 한다. 2021년 영국 신문 인디펜던트의 보도에 의하면 윌리엄의 장녀 샬럿은 편지에 “Papa is missing you(아빠가 할머니를 그리워하고 있어요)”라고 써,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
지금도 매일 다이애나를 그리워한다는 윌리엄. 그리고 이 둘의 윔블던 장면을 기억하는 영국민들에게 조지 왕자와 함께 나타난 중년 윌리엄의 모습은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