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이 일본에 0-3으로 참패했다. 비기기만 해도 가능했던 동아시안컵 4연패가 허망하게 날아갔다. 일본을 상대로는 지난해 3월 원정 친선 경기에서 0-3으로 패한 뒤 똑같은 스코어로 졌다.
한국은 27일 일본 아이치현 도요타시의 도요타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2 동아시안컵(EAFF E-1 챔피언십) 3차전에서 일본에 0-3으로 졌다. 대회 전적 2승 1패를 기록한 한국은 일본(2승 1무)에 밀려 우승에 실패했다. 경기 내용은 망신스러웠다. 한국이 기록한 유효슈팅은 1개에 불과했다. 그것도 후반 20분이 지나서야 나왔다.
동아시안컵은 국제축구연맹(FIFA)이 지정한 A매치 기간에 열리는 게 아니라서 구단의 의무 차출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다. 한국도, 일본도 자국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로 대표팀을 꾸렸다. 조건은 똑같았다. 변명의 여지 없는 완패였다.
◆동기부여 부재=동아시안컵은 2003년 처음 생겼다. 우승 상금(25만 달러)이 있지만, 동기부여는 늘 부족했다. 한·중·일 축구 팬 모두 이 대회에 나서는 국내파 대표팀이 ‘진짜 대표팀’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올해 대회도 남자 한일전 정도를 제외하면 관중석이 텅 비었다.
이러다 보니 중국처럼 23세 이하로 팀을 구성해 젊은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는 장으로 이 대회를 활용하기도 한다. 2019년 대회에서 한국에 졌던 일본은 도쿄 올림픽을 준비 중인 올림픽대표팀을 내보냈다. 동아시안컵은 각 나라 축구협회가 어떤 콘셉트로 대표팀을 구성해서 어떻게 활용할지 깊이 고민하는 대회다.
일본은 이번 대회 콘셉트를 ‘J리그의 자존심’으로 잡았다. 모리야스 하지메 일본 감독은 한일전 후 “선수들이 자신의 가치를 올리려는 대회에서 J리그의 가치를 올렸다”고 칭찬했다.
일본이 2차전에서 중국과 0-0 무승부를 기록하면서 모리야스 퇴진 여론까지 터지자 선수들이 똘똘 뭉친 게 도움을 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에 앞서 모리야스 감독이 처음부터 선수 구성 특징에 맞춰 J리그의 자존심을 지키자는 목표를 확실하게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한국 K리거들은 우승보다 파울루 벤투 감독으로부터 ‘눈도장’을 받는 자리로 인식했다. 결과적으로 이는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선수들은 개인 능력에서 일본에 완전히 밀렸다. 과연 우승을 위해 원팀이 됐는지, 벤투 감독조차 여전히 ‘테스트’에만 신경을 썼던 건 아닌지 의심스러운 결과가 나왔다.
또 동아시안컵을 앞두고 K리그 일부에서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힘든 일정 속에서 특정 팀들은 차출로 인한 출혈이 너무 크다는 내용이었다.
K리그 소속 선수들은 6월부터 찾아왔던 찜통더위 속에서 빡빡한 일정을 치르고 7월 토트넘과 친선 경기를 소화한 후 동아시안컵까지 뛰었다. 대표팀 지도자와 대한축구협회가 확실한 동기부여를 주지 못했다면, 어쩌면 일부 선수들은 제1의 목표를 ‘다치지 말자’로 여겼을지 모른다.
◆벤투의 불통=“일본은 수준이 달랐다. 우리도 최선을 다했지만 실수가 많았다.”
일본전 후 벤투 감독이 한 말이다. 그는 일본의 플레이가 예상한 대로라고 했지만, 경기를 보면 정말 그랬는지 의문이다. 일본은 경기 초반부터 강한 압박으로 한국을 밀어붙였고, 강한 체력을 앞세워 후반에 승부를 걸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그리고 그대로 해냈다.
반면 한국은 그동안 벤투 감독이 해왔던 그대로 후방부터 점유율을 높여가는 방식으로만 대응했다. 벤투 감독이 그동안 잘 기용하지 않았던 수비수들, 몇 년 만에 갑자기 수비형 미드필더 자리로 올라간 권경원(감바 오사카)은 전반 내내 중원에서 허둥지둥했다. 수비진과 미드필더 간격이 너무 넓어져서 제대로 공격 전개도 하지 못했다.
팬들의 속은 터지는데 벤투 감독의 ‘유체이탈 화법’이 더 화를 돋웠다. 그는 경기 후 방송 인터뷰에서 “코치진과 한국 국민이 알아야 하는 게 있다. 비주전 선수들이 격차를 좁히려고 한다면 그 격차는 더 커질 것”이라고 했다.
수수께끼 같은 이 말의 속뜻은 뭘까. 아마도 K리그에서 뛰는 대표팀 비주전 선수들 위주로 팀을 만드는 데 신경을 쓰면 팀 발전에 방해가 된다는 뜻으로 보인다. 애매모호한 인터뷰에 팬들이 더 폭발했다.
벤투 감독은 일본전이 열리기 전 대한축구협회와 진행한 인터뷰에서도 협회 직원이 “이번 대회에 젊은 선수들이 많이 선발됐는데, 어떻게 봤나”라고 묻자 “한국에서는 선수들을 평가할 때 선수 위주로 보는 경향이 있다. 팀으로 평가하고자 한다.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동문서답을 했다. 한일전 완패에 대해서도 “아시아에선 서로를 비교하려고 하는데 그건 옳지 않다. 서로 환경이 다르다”고 했다.
감독이 인터뷰 스킬까지 좋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벤투 감독은 자신의 기준에 맞는 선수 위주로만 스쿼드를 구성하고, 상대 팀이 바뀌어도 전술에 거의 변화를 주지 않는 등 고집스럽게 팀을 운영한다. 아시아 예선과 월드컵 본선은 완전히 다른데, 어떤 방식으로 변화를 줄 것이냐는 질문에도 답하지 않았다.
벤투 감독이 대표팀을 맡은 후 손흥민(토트넘) 황의조(보르도) 김민재(나폴리) 등 유럽파들이 있을 때는 좋은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순수 국내파로 경기할 때는 대부분 결과가 안 좋았다. 이런 상황이 4년간 이어지면 벤투 감독의 지도력인지, 특정 선수에게 의존해서 나오는 경기력인지 의심스러워진다. 그런데 벤투는 그저 “비교하지 말라”고만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