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영화가 안 그렇겠느냐마는 영화 ‘헌트’는 이정재의 눅진한 노력이 꽉 담긴 영화다. 배우로 30여년의 세월을 보낸 이의 감독 데뷔작이기 때문에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을 터다.
이정재는 최근 ‘헌트’ 개봉을 앞두고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이 작품을 무려 5년여 동안 준비했다며, 그러면서도 시나리오를 쓴다는 이야기를 밖에서 잘 하지도 못 했다고 털어놨다. 영화를 ‘제대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컸는지를 느낄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함께 출연하는 배우의 마음과 현장에서 일하는 스태프들의 고충, 평론가들의 비평까지 하나하나 귀에 새긴 작업기는 듣는 것만으로 절로 탄성이 나오게 했다. -영화 개봉이 코앞이라 바쁘고 일정도 힘들겠다. “영화 작업이 끝났기 때문에 진짜 힘든 건 끝이라고 본다. 나로서는 이 마무리가 최선이었다고 생각한다. 당당하게 많은 개인적인 고민과 많은 분의 의견이 합쳐진 결과라고 얘기할 수 있다. 사실은 언론 시사회 이후에도 작업을 며칠 더 했다. 편집을 바꾼 건 아니고 사운드 적인 부분과 색 보정, 컴퓨터 그래픽 작업을 더 했다. 이제 정말 끝났다.”
-감독으로서 상업영화 데뷔다. 작품에 만족하나. “전체적으로 보면 내가 의도했던 대로 마무리가 됐다. 많은 분의 의견을 받았다. 투자배급사, 블라인드 시사에서의 의견, 제작사 등. 예상하지 못 했던 의견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서 최대한 다 반영하려고 했다. 그리고 시간이 없어도 그분들 의견을 반영한 부분은 다 직접 보여드리고 확인시켜드렸다. 의견을 많이 받았고, 반영했고,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만족한다.”
-왜 직접 감독을 맡을 결심을 했나. “아무도 이 영화를 찍어주지 않으니까. (웃음) 훌륭한 감독님이 맡아 찍어주셨다면 나야 좋았을 거다. 그런데 다들 고사를 하셨다. 사실 만들기 전에는 얼마나 만족할 수 있는 영화가 나올지 모르는 거겠지만, 시도는 해볼 만한 프로젝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감독을 찾는 데 쓰는 시간이 아까워서 ‘나는 이런 방향으로 가면 좋겠다’는 마음을 보여주려고 시나리오를 쓰게 됐다. 그러다 초고가 완성됐고, 수정고가 나왔다. 그 기간이 굉장히 길었다. 그 사이에 7편의 작품을 했는데, 그러다 보니 ‘내가 왜 여기에 이렇게 집착을 하고 이걸 쓰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 수차례 포기도 했다. (웃음) 그래도 완성고가 나왔고, 제작사에서 ‘이 정도 썼으면 연출을 직접 해 봐도 좋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해서 연출까지 하게 됐다. 나로서는 용기를 한 번 더 낸 것이다.”
-시나리오나 연출 작업에서 어려움이 있었다면. “막다른 길이 너무 많았다. 스파이 장르의 특색을 살려야 하는데, 시나리오를 처음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직조된 치밀함을 살리기가 어렵더라. 자료 조사를 하는 데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고, 조사된 자료들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내용이 아닌지를 확인하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이 정도 반전으로는 안 되는데’ 싶어 검열을 스스로 많이 했다. 관객들에게 만족감을 줄 수 있을 만큼 캐릭터의 온도를 올리는 데도 신경을 썼다. 1980년대라는 시대 배경을 그대로 쓸지도 고민이었다. 사실 현대 버전의 시나리오도 있다. (웃음) 결과적으로 영화에 담고 싶었던 메시지를 제대로 살리려면 1980년대 배경이 좋겠다고 결론이 나서 지금의 버전이 된 것이다.”
-어느 정도 작품을 준비했나. “시나리오만 4년 정도를 썼다. 프리 작업이 5개월, 촬영도 약 5개월이었다. 합쳐서 5년 반 정도 되지 않았나 싶다.”
-그 오랜 준비 기간 동안 주변 동료들에게서 들은 조언이 있다면. “‘뭘 그렇게 여기에 매달리느냐’는 말을 많이 들었다. (웃음) 사실 시나리오는 거의 숨어서 썼다. 내가 글을 쓰고 있다는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 자랑거리도 아니고, 쓰다가 포기했을 경우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포기했는데 누가 ‘그 작품 어떻게 돼 가?’라고 물으면 머쓱하지 않나. 4~5년 동안 7 작품은 굉장히 빡빡한 스케줄이기 때문에 설마 내가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는 생각을 주변에서 못 했을 거다.”
-연출가로서의 경험이 배우 일에도 도움이 될까. “연출이 연기에 도움이 될까는 아직 결론을 못 낸 부분이다. 다만 시나리오를 쓰는 건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동료 연기자들에게 연출하라는 소리는 안 하는데 시나리오 쓰라는 말은 많이 한다. 캐릭터를 설정하고 그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 무엇을 삶의 목표로 두고 사는지를 상상하는 과정을 통해 사고를 확장할 수 있더라. 좋은 경험이었다.” -정우성이 네 번이나 캐스팅을 거절했다고 하던데. “사실 그 이야기를 공개한 건 우리가 사심으로 일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어서다. 정우성 배우의 입장에선 거절할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태양은 없다’ 이후 많은 영화인이 우리에게 ‘두 배우가 함께 나오는 영화를 빨리 보고 싶다’거나 ‘너희 둘 데리고 빨리 영화를 찍어야 하는데’라는 말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나름대로는 우리 둘이 나오는 영화는 흥행이 잘되거나 작품성으로는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중압감이 있었다. 그런데 정우성은 내가 연출을 하면서 연기까지 하고, 거기에 자기까지 출연을 한다고 하면 너무 해결해야 할 일들이 많다고 생각한 거다. 실질적으로 거절할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처음부터 박평호를 본인(이정재)의 롤로 생각했나. “전혀 아니다. 나는 모든 인물을 열어뒀다. 연출하는 입장에서 배우들에게 선택권을 먼저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먼저 누구를 찜하고 다른 배우들에게 나머지에서 고르라고 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았다. ‘당신이 하나를 고르면 나머지를 내가 할게요’라는 방식으로 캐스팅을 했다.”
-액션 연기는 어땠나. “이제는 액션신을 연기하기 싫다. 몸도 무겁고 솔직히 전만큼 속도도 잘 안 나온다. 테이크 가면 갈수록 더 힘들어지고 그림도 안좋아진다. (웃음)”
-감독으로서 배우 이정재를 다시 캐스팅할 마음이 있나. “앞으로는 연기만 하고 싶다. (웃음) 사실 배우가 연출을 한다는 게 스태프들에게도 부담이 되겠더라. 그냥 연출만 하는 사람이면 시원하게 ‘이건 이랬으면 좋겠다’고 하면 되는데, 나는 연기를 해야 하니까 스태프들이 연기자로서 나의 컨디션까지 고려하는 게 느껴졌다. 연기자의 컨디션이 좋아야 좋은 연기가 나오고, 스태프와 연출가는 그런 좋은 연기를 잘 담아야 좋은 장면이 나온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어서다. 그래서 현장에서 나름대로는 대화를 많이 하려고 노력했다. 모든 사람이 다 만족할 수 있는 방향으로 끝내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했다. 사실 연출을 해보니 연기가 진짜 어렵게 느껴졌다. 더 잘할 수 있게 계속 연기에 매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