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 FIFA(국제축구연맹) 월드컵은 프랑스에서 열렸다. 결승전에서 만난 나라는 개최국 프랑스와 브라질이었다. 결승전이 열린 스타드 드 프랑스 경기장에는 8만 명의 관중이 가득 들어찼다. 경기 전 프랑스 국가가 연주되자, 홈팀 관중은 이를 목청껏 따라 부르는 장관을 연출했다. 하지만 그라운드에 선 프랑스 선수들은 국가 부르는데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했다. 실제로 몇 선수는 부르는 시늉만 했다. 입을 다물고 있는 이도 있었다.
2006 독일 월드컵 결승전에 올라간 프랑스 대표팀도 1998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도리어 홈 구장이 아니어서인지 8년 전 국가 연주 때보다 더 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사실 프랑스 축구대표팀이 국가 연주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프랑스의 국가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는 경쾌한 멜로디로 혁명 시대를 상징하는 유명한 곡이다. 팝 그룹 비틀즈의 히트곡이자 영화 ‘러브 액츄얼리(Love Actually)’의 삽입곡으로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All You Need Is Love’의 도입부에 나오는 연주가 바로 라 마르세예즈이다.
1789년 7월 왕, 성직자, 귀족의 횡포에 대항해 파리 시민은 혁명을 일으켰다. 혁명은 곧 전국적으로 퍼졌고, 주변국은 프랑스 혁명의 불길이 자국으로 번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에 오스트리아, 프러시아가 주축이 된 반혁명 연합군이 프랑스를 침공한다. 혁명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1792년 4월 전쟁 소식을 들은 공병 대위 루제 드릴은 혁명군을 위해 군가를 만든다. 이 노래는 곧 널리 보급되었다. 한편 프랑스의 남부 마르세이유 출신 의용병들은 혁명을 지지하기 위해 파리에 입성하면서 이 군가를 불렀다. 이에 시민들이 이 곡을 ‘마르세이유 찬가’라고 부르다 결국 ‘라 마르세예즈’란 이름을 갖게 된다. 이후 이 노래는 프랑스 제1공화국의 국가가 되었다가 취소된 데 이어 금지곡이 되는 등 여러 논란을 겪었다. 하지만 프랑스가 제3공화국이 된 후 1879년 라 마르세예즈는 국가로 다시 지정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곡은 혁명시대 때 군가에서 시작된 연유로 인해, 한 나라의 국가치고는 꽤 험악한 가사를 담고 있다. 7절까지 있는 라 마르세예즈는 스포츠 경기에서 주로 1절만 불린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점잖은 1절에도 “적군이 너의 자식과 아내의 목을 벤다” “우리의 밭고랑을 적군의 더러운 피로 적시자”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이 국가는 또한 인종 차별과 외국인 혐오를 부추키는 가사를 가지고 있어, 프랑스 지배를 받았던 옛 식민지 국가들이 심한 거부감을 보일 때도 있다.
나름 평화적으로 식민지들을 독립시키거나 자치권을 주면서 대영제국을 해체한 영국과는 달리, 프랑스는 전쟁도 불사하며 식민지를 지키기 위해 온갖 짓을 다 했다. 대표적인 희생양이 알제리다.
1945년 5월 8일 나치 독일이 유럽에서 항복한 날 알제리에서는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가 터졌다. 경찰과 시위대는 곧 충돌했고, 양측에서 꽤 많은 사상자가 나온다. 이에 프랑스는 해군, 공군까지 동원한 대대적인 보복을 가해 최소 3만 명 이상의 알제리인들을 학살했다. 결국 알제리는 8년의 독립전쟁 끝에 1962년 독립한다. 한편 독립을 막기 위해 수많은 학살을 저지른 프랑스는 그들이 중요시하는 가치 ‘똘레랑스(tolerance, 다양성과 타인에 대한 배려)’의 모순을 보여주었다.
축구에서 국가를 둘러싼 논란은 1996년 시작됐다. 당시 극우정당 국민전선의 당수였던 장마리 르펜은 대표팀에 흑인 선수가 너무 많다는 지적과 함께 국가를 부르지 않는 선수는 “가짜 프랑스인”이라는 선동적인 발언을 한 것이다. 이에 항의 차원으로 식민지 출신 선수들은 국가 제창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프랑스 태생이지만 알제리 혈통을 가진 지네디 지단과 카림 벤제마는 국가를 부르지 않는 대표적인 선수였다. 하지만 벤제마는 6년 만에 국가대표로 복귀한 유로 2020에서 국가를 처음으로 따라 불러 달라진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국가 제창을 거부한 선수에 대한 여론 또한 극명하게 갈린다. 라 마르세예즈는 극단적인 민족주의를 담고 있어, 과거 프랑스가 알제리에 가한 만행을 거론하며 이를 이해한다는 이들도 있다. 반면 알제리인들이 과거에 받은 고통은 공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표선수가 국가를 거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여론도 높다. 즉 프랑스인이 갖는 혜택은 누리면서 국가를 거부하는 선수들의 이중적인 태도에 실망했다는 것이다.
한때 프랑스를 하나로 만든 노래 라 마르세예즈는 21세기 들어 축구장 안팎에서 여러 논쟁을 야기한다. 2001년 프랑스는 알제리 대표팀을 파리로 초대해 친선 경기를 가졌다. 두 나라 간에 벌어진 첫 번째 축구 경기였다. 당시 프랑스 국가가 연주되자 알제리 출신의 관중들은 엄청난 야유를 보낸다. 결국 경기는 프랑스가 4-1로 앞선 가운데 알제리 관중들이 피치를 점거함으로써 중단됐다.
2007년과 2008년 프랑스 대표팀은 과거 식민지 국가였던 모로코와 튀니지를 상대로 파리에서 친선 경기를 가졌다. 국가가 연주되자 경기장에 있던 북아프리카 이민자들은 야유를 보냈고, 프랑스 정치인들은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드러냈다. 2014년에는 법무부 장관이자 흑인인 크리스티안 타우비라가 국가를 부르지 않아 구설에 올랐다.
최근 프랑스 대표 선수들은 논란을 피하고자 다들 국가를 부르는 듯한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이민자 출신이 다수인 대표팀이 감정 없이 기계적으로 국가를 부르는 모습은 안타까움을 줄 뿐이다.
디펜딩 챔피언 프랑스는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호주, 덴마크, 튀니지와 함께 D조에 속해 있다. 과거사로 인한 프랑스와 튀니지의 대결에 관심이 모이는 가운데, 라 마르세예즈를 두고 두 나라 응원단이 벌일 공방전도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