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는 기자들이랑 전기 리그 끝나고 야유회도 갔지."(선동열 전 국가대표 감독) "그 당시 낮 경기 끝나면 집에서 기자들하고 고스톱도 쳤어."(김시진 전 롯데자이언츠 감독) "시카고 화이트삭스에 있을 때 쟤(선동열 감독) 좀 데려오라고 추천했는데…."(이만수 전 SK 와이번스 감독)
멍석을 깔아주니 이야기보따리가 풀어졌다. 한 시대를 풍미한 프로야구 레전드인 만큼 입담의 무게도 묵직했다. 케케묵은 비하인드 스토리부터 과거엔 민감할 수 있는 '영업 비밀'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일간스포츠 창간 53주년 사진전에서 공감대가 형성된 키워드는 역시 '사진'이었다. 김시진 전 감독은 "다 뺏겨서 없다. 1987년쯤인가, 책을 쓴다고 해서 (출판사에) 사진을 거의 200장 정도 줬던 거 같다. 그걸 돌려받지 못했다"며 "며칠 전 (최)동원이 관련해서 인터뷰했는데 대학생 때 대표팀에 뽑혀 같이 찍은 사진도 없더라. (이만수 전 감독을 가리키며) 당신하고 찍은 사진도 2~3장밖에 없다"고 아쉬워했다. 김시진 전 감독과 이만수 전 감독은 대구상고(현 대구상원고)와 한양대 동문에다 삼성 라이온즈에서 배터리로 호흡을 맞춘 '절친'이다. 서로를 알고 지낸 시간이 꽤 길지만, 학창시절 함께 찍은 사진은 귀하디귀하다.
옆에 있던 선동열 전 감독이 거들었다. 선수 시절 불세출의 스타였던 선 전 감독은 일거수일투족이 스포츠신문 1면을 장식했다. 그와 관련한 사진을 선점하려고 사진 기자들의 경쟁도 불꽃 튀었다. 선동열 전 감독은 "그때만 해도 집에 와서 사진을 많이 찍었다. 앨범을 보고 '이거 좀 쓰고 돌려주겠다'고 그랬지만 실제 돌려준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서 어릴 때 사진이 아예 없다"고 푸념했다.
김시진 전 감독은 "사진하면 생각나는 일화가 하나 있다"며 "1978년 이탈리아 세계선수권대회에 나가서 (박)철순이형이 필름 카메라를 하나 샀다. 로마 트레비 분수 앞에서 선글라스 끼고 폼을 잡았다. 지나가던 사람한테 사진을 부탁했는데 빽빽(back back) 외치며, 계속 뒤로 가라고 하더라. 그 순간 카메라를 갖고 도망갔다. 그땐 내가 발도 빨랐는데 그를 잡지 못했다"며 웃었다.
취재 환경도 달라졌다. 과거엔 일간스포츠를 비롯한 오프라인 몇몇 매체만 야구를 취재했다. 현장 기자가 적으니 가족 같은 분위기가 유지됐다. 선동열 전 감독은 "전기 리그가 끝나면 후기 리그를 앞두고 브레이크 타임이 있었다. 그때 기자들과 야유회를 가서 각종 고기를 함께 먹었다. 해태의 전통 같은 거였다"고 회상했다. 김시진 전 감독은 "그 당시 (기자라고 하더라도) 나이가 많으면 형처럼 생각하고 같이 어울렸다"며 "부산(롯데)에 있을 때는 와이프한테 전화해서 (기자들과) 집으로 갔다. 거기서 고스톱도 치고 복개천에 나가서 술도 함께 마셨다"고 맞장구를 쳤다.
선동열 전 감독과 김시진 전 감독은 '슬라이더 마스터'라는 공통점이 있다. 김 전 감독은 "선 감독 공을 처음 본 게 1982년 세계선수권대회에 차출되고 나서다. 그때 선 감독은 고려대를 다닐 때였고, 난 군대 상병이었다. 서울 역삼도 반도유스호스텔에서 합숙했는데 선 감독의 슬라이더를 보고 깜짝 놀랐다"며 "어떻게 슬라이더 추진력이 저렇게 좋을까 싶었다. 타자 앞에서 꺾이는 게 내가 던지는 슬라이더하고 차이가 있었다. 다만 어떻게 던지냐고 물어보진 못했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멋쩍게 칭찬을 듣고 있던 선동열 전 감독은 "시진이 형이나 (임)호균이 형을 비롯해 선배들이 던지는 걸 보고 '우리나라 투수가 최고구나' 싶었다. 시진이 형은 투구 폼이 굉장히 간결하면서도 부드러웠다. 커맨드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엄지를 치켜들었다.
이만수 전 감독은 선동열 전 감독을 향해 "쟤가 왔어야 했다"며 농을 쳤다. 이 전 감독은 1997시즌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쳤다. 이듬해 미국 행을 선택했고 2000년부터 2006년까지 시카고 화이트삭스 불펜 포수와 불펜코치로 활약했다. 이만수 전 감독은 "당시 켄 윌리엄스 화이트삭스 단장과 제리 매뉴얼 감독에게 (선동열) 영입을 추천했다. 선동열 감독은 영리해서 잘할 거 같았다"며 "(그 당시 미국에선) 아시아 야구를 얕보는 게 있었다. 선동열 감독이 (메이저리그를) 통일시켰어야 했는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지 않았다. 조계현, 이강철까지 3명을 추천했는데 모두 내 타율을 깎아 먹은 투수들"이라고 추억했다.
이만수 전 감독은 "미국에서 깜짝 놀란 건 영업 비밀이라고 할 수 있는 걸 선수들에게 물어보면 다 알려주더라. 우리와 스타일이 달랐다"고 했다. 이를 듣고 있던 김시진 전 감독은 "우리 땐 올스타전을 3차전까지 했는데 당시 친한 사람들끼리 술을 마시면 그립 같은 영업 비밀을 다 알려줬다. 그래서 올스타가 아니라 '술스타'였다. 이 감독은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아 몰랐을 뿐"이라며 껄껄 웃었다.
일간스포츠와 사연도 깊다. 일간스포츠는 1984년까지 국내 유일의 스포츠 전문지였다. 프로야구가 태생한 1982년에도 유일하게 현장을 지켰다. 선동열 전 감독은 "소년 체전에 나갔던 중학생 때 일간스포츠에 처음 기사가 실렸던 거 같다. (프로에 와서는) 1988년부터인가 일간스포츠가 주관하는 시상식에서 최고투수상을 다섯 번인가 연속으로 받았다. 그때만 해도 다섯 냥짜리 금메달을 부상으로 줬다. 아직도 그걸 갖고 있다. 일간스포츠와 좋은 추억이 많다"고 회상했다.
김시진 전 감독도 뒤지지 않았다. 김 전 감독은 "일간스포츠에 처음 나온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동대문야구장에서 비가 와서 노게임이 선언됐는데 다음 날 선발로 나가서 이겼다. 그때부터 인연이 시작됐다"며 "(은퇴한 뒤에는 일간스포츠 시상식에서) 프로코치상을 두 번인가 세 번 받았다. 난 일간스포츠에 서운한 게 하나도 없다"며 웃었다. 이만수 전 감독도 선수 시절 일간스포츠 시상식과 지면을 수차례 채웠다. 2017년에는 일간스포츠와 조아제약이 공동 제정한 조아제약 프로야구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받았다. 자비로 자선 재단 헐크파운데이션을 만들고, 야구 불모지 라오스에 야구를 전파하는 산파 역할을 한 공로를 인정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