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무슨 소리인가 했다. UFC 진출을 눈앞에 둔 베테랑 파이터가 '몸치'라니. 처음 찾아갔던 격투기 도장에서 당한 뼈아픈(?) 기억은 초심을 잃지 않게 만드는 중요한 자산이 됐다. '로드 투 UFC' 토너먼트에 참가 중인 기원빈(31·팀데인저)의 얘기다.
2014년 데뷔한 기원빈은9년 차 베테랑 파이터다. 현재 UFC가 주최하는 '로드 투 UFC' 라이트급(70㎏ 이하) 토너먼트에 참가하고 있다. 지난 6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대회 1라운드에서 기시무라진노스케(일본)를 1라운드 4분 45초 만에 TKO로 제압했다. 주짓수가 특기인 기시무라가 끊임없이 관절기를 시도했지만, 기원빈은 월등한 힘과 레슬링 실력으로 상대를 압도했다.
기원빈은 오는 10월 23일 아랍에미리트 아부바디에서 열리는 2라운드 4강전에서 인도네시아 파이터 제카 사라기와 맞붙는다. 이 경기에서 이기면 결승에 올라 꿈에 그리던 UFC 정식 계약을 눈앞에 두게 된다.
기원빈은 다양한 단체에서 잔뼈가 굵다. 격투기 마니아라면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거의 없다. 2014년 데뷔전 이후 국내 단체인 로드FC, 더블지FC에서 정상급 파이터로 활약했다. DEEP, 슈토, 디 아웃사이더 등 일본 무대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통산 전적은 23전 16승 7패.
기원빈을 처음 보면 '몸이 좋다'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든다. 라이트급 선수들은 대부분 마른 체형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기원빈은 근육질 몸매다. 특히 목과 척추, 어깨를 이어주는 승모근이 유독 발달했다. 엘리트 레슬링 선수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기원빈은 고등학생 때까지 격투기와 전혀 인연이 없었다. 삐쩍 마른 평범한 학생이었다. 대학도 운동과 상관없는 경영학과에 들어갔다.
어느날 가슴에 불이 붙었다. TV에서 격투기 경기를 보고 '나도 강해지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단다. 한걸음에 종합격투기 체육관을 찾아갔다. 나름 운동을 좀 한다고 생각해서 자신감도 있었다. 무턱대고 체육관 관장에게 "격투기를 배우고 싶습니다. 선수랑 붙여주십시요"라고 큰소리쳤다.
황당해하던 관장님은 이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체육관에서 어린 여학생을 가리켰다. 딱 봐도 선수가 아닌 일반 관원이었다. "그래? 그럼 저 여자애하고 한 번 해봐"라고 스파링을 허락했다.
'날 뭘로 보고.' 기원빈은 기분이 상했다. 결과는? 불과 몇 초 만에 암바에 걸려 '광속 탭'을 쳤다. 그렇게 팔이 빠질 것 같은 고통은 처음 느꼈다.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격투기 초심자들이 이런 경험을 하면 열에 아홉은 곧바로 그만둔다. 부끄러워서다. 하지만 기원빈은 달랐다. 그날부터 매일 체육관을 찾아가 기본기부터 배웠다. 이때 자신이 '몸치'라는 것을 깨달았단다. 남들보다 몇 배 열심히 해야 남들을 따라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 이후 그는 누구나 인정할만한 '연습벌레'가 됐다.
"운동을 하면서 제가 힘도 없고 기술 습득도 느리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운동은 정직하다'는 말을 믿었죠. 성실함은 자신 있었습니다. 잠자는 시간도 줄여가면서 노력하다 보니 조금씩 몸이 따라와 주더라고요. 지금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어떻게 하면 격투기를 잘할 수 있을까'만 생각합니다."
군복무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프로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꾸준히 승수를 쌓으면서 이름을 알렸다. 국내 최대 단체인 로드FC에서 5연승을 거뒀다. 2017년 큰 화제를 모았던 '100만불 토너먼트'에 한국 대표선수로 참가하기도 했다.
기원빈의 가능성을 보여준 경기는 2017년 4월 만수르 바르나위(튀니지)와의 대결이었다. 바르나위는 당시 토너먼트에서 압도적인 피지컬과 실력을 뽐냈다. 바르나위는 결승전에서 당시 챔피언 권아솔을 꺾고 100만 달러의 우승 상금을 챙겼다.
그런 바르나위를 벼랑 끝까지 몰고 갔던 선수가 기원빈이었다. 결과는 1라운드 4분 46초만에 서브미션 패배. 하지만 리어네이키드 초크에 걸리기 전까지 기원빈은바르나위에게위력적인 펀치를 적중시켰다. 그라운드 싸움에서도 밀리지 않았다. 너무 서두르다 순간적으로 목을 내주는 실수만 아니었다면 100만 달러는 그의 통장에 들어갔을지 모른다.
"바르나위와 경기는 아쉬움이 많이 남았죠. 경기 후 많이 생각난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거기에 계속 빠져있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좋은 경험으로 삼고 더 성장하려 했습니다."
기원빈에게 UFC는 격투기를 시작하고 가슴에 오래 품어온 목표다. 기원빈은 2019년 로드FC와 일본 무대에서 5연승을 달리던 중 UFC로부터 계약 오퍼를 받은 적이 있다. 한 번만 더 이기면 UFC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햄스트링 부상이 발목을 잡았다. UFC 진출이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데 무리하게 경기에 나섰다. 44초 만에 KO패. UFC 꿈은 물거품이 됐다.
"솔직히 그때는 다 내려놓고 싶었습니다. 제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기도 했고요. 그래도 마음을 다잡고 실패로부터 하나라도 더 배우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슬프고 일이 안 풀리더라도 언젠가는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원빈은 유명해지거나 돈을 많이 버는 게 목표가 아니라고 했다. UFC에서 강한 상대들과 대결하면서 더 성장하고 싶다는 게 그의 바람이다. 26전을 치르는 동안 한 번도 스스로 만족한 경기를 해본 적이 없다는 그는 UFC를 통해 어디까지 강해질 수 있는지 시험대에 오르고자 한다.
"끝까지 올라가고 싶습니다. 가장 강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 UFC잖아요. 제가 얼마나 강해지고 성장할 수 있는지 알고 싶고, 제대로 도전해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