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 키움 히어로즈는 결단을 내렸다. FA(자유계약선수)로 풀린 간판타자 박병호(36·현 KT 위즈)와 계약을 포기했다. 에이징 커브(일정 나이가 되면 운동능력이 저하되며 기량 하락으로 이어지는 현상)가 시작됐다는 판단으로 제대로 된 협상 테이블조차 꾸리지 않았다. 박병호는 계약 기간 3년, 최대 30억원을 받는 조건으로 KT 유니폼을 입었다. KT는 키움에 건넨 보상금 22억5000만원을 포함, 최대 52억5000만원을 부담했다. 시장의 예상을 깬 통 큰 베팅이었다.
키움이 박병호와 결별한 가장 큰 이유는 기록 하락이다. 박병호의 지난 시즌 타율이 0.227(409타수 93안타)로 규정타석을 채운 KBO리그 타자 53명 중 꼴찌였다. 타율 0.223(309타수 69안타)를 기록한 2020년에 이어 2년 연속 각종 타격 수치가 급락했다. 야구통계전문업체 스포츠투아이에 따르면, 인플레이 타구 기준 타구 속도마저 전년 대비 4.5㎞/h 느려진 139.3㎞/h로 측정됐다. 홈런이 간헐적으로 터졌지만, 타석에서의 생산성은 뚝 떨어진 모습이었다.
투자 여유가 없는 구단 상황도 한몫했다. 모기업이 없는 히어로즈는 2019년부터 5년 동안 키움증권에 네이밍 라이츠(Naming rights, 팀 명에 기업명을 붙이는 권리)를 팔아 그 대가로 연간 100억원씩을 받고 있다. 키움은 지난해에 국내 선수 연봉으로 60억원 이상을 지출했다. 외국인 선수 연봉을 포함하면 80~90억원에 이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19 영향으로 관중 수입이 크게 줄어 운신의 폭이 더 좁아졌다. 2018년부터 4년 동안 박병호에게 총연봉 65억원을 투자했지만 '더는 어렵다'는 판단이었다. 박병호는 2015년 11월 미국 메이저리그(MLB) 진출하며 이적료 개념의 포스팅 비용 1285만 달러(당시 환율 147억원)를 히어로즈 구단에 안겼다. 구단 안팎에선 키움의 미온적인 협상 태도에 대해 "박병호의 섭섭함이 크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키움을 떠난 박병호는 올 시즌 재기했다. 정규시즌 124경기에서 타율 0.275(429타수 118안타)를 기록했다. 홈런 35개를 쏘아 올려 개인 통산 여섯 번째 홈런왕까지 차지했다. 지난 6월에는 전무후무한 9시즌 연속 20홈런이라는 대기록까지 수립했다. 평균 타구 속도를 141.2㎞/h로 끌어올렸고 타구 발사각도 25.2도 향상했다. 더 높은 각도에서 더 강한 타구를 날리니 타구의 질이 180도 달라졌다. 배럴 타구 꽤 늘었다. 배럴 타구는 발사각 26~30도, 그리고 타구 속도 98마일(157.7㎞/h) 이상인 이상적인 타구를 의미한다.
유한준이 은퇴한 KT는 베테랑 박병호가 타선의 중심을 잡았다. 그의 존재는 외국인 타자 헨리 라모스와 강백호가 연쇄 부상으로 쓰러진 악재 속에서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KT 구단이 전폭적으로 박병호를를 신뢰했다.
박병호는 지난달 11일 전열에서 이탈했다. 2루타를 때려낸 뒤 태그를 피해 2루를 밟다가 발목을 접질렸다. 구급차에 실려 야구장을 빠져나갈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다. 병원 세 곳에서 교차 검진한 결과, 오른발목 앞뒤 인대 손상(파열)이 발견됐다. 박병호는 예상보다 빠르게 몸 상태를 추슬렀다. 이강철 KT 감독이 "(회복 속도에) 놀랐다"고 말할 정도였다. 정규시즌 막판 1군에 복귀한 그는 포스트시즌(PS)을 뛰고 있다.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 KIA 타이거즈를 꺾은 KT의 준플레이오프(준PO·5전 3승제) 상대가 공교롭게도 키움이다. 홍원기 키움 감독은 "단기전은 변수가 많다. 어느 팀이 분위기를 선점하고 그걸 극대화하느냐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박병호는 준PO 1차전에서 0-4로 뒤진 7회 초 선두 타자 솔로 홈런을 터트렸다. KT는 4-8로 패했지만, 박병호 홈런 이후 4-4 동점에 성공하며 키움 마운드를 압박했다. 박병호는 준PO 2차전에선 1회 초 1사 1,2루에서 중전 안타로 결승타를 책임졌다. KT가 패한 3차전 성적은 3타수 1안타 2삼진.
키움과 KT의 준PO는 일찌감치 '박병호 시리즈'로 불렸다. 예상대로 박병호 타석에서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키움으로선 박병호에게 맞으면, 더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