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칙적인 마운드 운영은 야구 단기전의 묘미다. 선발 투수 순번을 두고 연막을 펼치고, 1이닝을 불펜 투수 2~3명을 투입해 끊어 막으며, 에이스가 9회에 등판하기도 한다.
올 시즌은 선발 투수의 구원 등판이 두드러진다. 19일까지 열린 와일드카드 결정전과 준플레이오프(PO) 1~3차전은 그 결과와 여파에 희비가 엇갈렸다.
김종국 KIA 타이거즈 감독이 포문을 열었다. 어드밴티지 1승을 KT 위즈에 내준 상황. 패배는 곧 탈락이었다. 이에 김 감독은 토종 에이스 양현종을 제외한 모든 투수를 1차전(13일 수원KT위즈파크)에 대기시켰다.
실제로 선발 투수 3명이 투입되는 총력전이 펼쳐졌다. 9~10월 등판한 7경기에서 평균자책점 0.99를 기록하며 컨디션이 좋았던 션 놀린이 2와 3분의 2이닝 동안 3점을 내주자, 다른 외국인 투수 토마스 파노니를 투입했다.
이 선택은 맞아떨어졌다. 파노니는 3과 3분의 1이닝 동안 무실점을 기록하며 KIA의 추격 발판을 만들었다. 그러나 8회 말 등판한 4선발이자 정규시즌 10승 투수인 이의리가 1사 뒤 볼넷 3개를 내주며 만루를 자초했다. 위기에서 등판한 셋업맨 장현식이 배정대에게 3타점 좌전 안타를 맞으며 승기를 내줬다. KIA는 2-6으로 패했고, 한 경기로 가을야구를 마쳤다.
이의리는 데뷔 2년(2021~2022) 동안 선발 투수를 맡았다. 정규시즌 구원 등판은 한 경기에 불과했다. 경험이 적은 투수가 익숙하지 않은 임무를 일리미네이션 게임, 그것도 1점 차(스코어 2-3)로 지고 있던 8회에 수행하다 보니 멘털이 흔들린 것.
벤치도 데이터 야구를 하지 못했다. 비록 자초했지만, 이의리는 만루에서 피안타율 0.167에 불과했다. 정규시즌 막판나선 9월 24일 창원 NC 다이노스전, 10월 4일 LG 트윈스전에서도 각각 무사 만루와 1사 만루 기회를 무실점으로 넘긴 바 있다. 이 상황에서 등판한 장현식의 만루 피안타율은 조금 더 높은 0.250이었다. 결국 보직 파괴로 강수를 뒀지만, 정작 데이터가 적용돼야 할 시점엔 선수의 멘털을 먼저 주시했다. 결과도 안 좋았다.
와일드카드 시리즈부터 치른 이강철 KT 감독도 선발 투수를 투입해 승리 의지를 드러낸 바 있다. 13일 KIA전 8회 말, 외국인 투수 웨스 벤자민에게 1이닝을 맡겼다. 원래 불펜 피칭을 하는 날이었는데, 이를 실전에서 소화하도록 유도한 것.
벤자민은 8회 세 타자를 가볍게 범타 처리하며 홀드를 챙겼고, KT는 6-2로 이겼다.
벤자민은 주 임무도 잘 했다. 나흘 뒤 키움 히어로즈와의 준PO 2차전에서 선발 투수로 나서 7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했다. 2-0 승리를 이끌고 승수까지 챙겼다. 여기까진 이강철 감독의 선택도 맞아 떨어졌다.
그러나 KT도 절반의 성공이다. 준PO 3차전에서 선발 투수 오드리사머 데스파이네를 두 번째 투수로 붙인 선택이 실패로 돌아갔다.
KT는 선발 투수 고영표가 1회 초 야시엘 푸이그에게 3점 홈런을 맞고 기선을 내줬다. 3회도 선두 타자 이용규에게 안타, 1사 뒤 김혜성에게 중전 2루타를 맞고 추가 실점했다. 이강철 감독은 이 상황에서 데스파이네를 투입했지만, 그가 푸이그에게 경기 5번째 실점을 허용하는 좌전 적시타를 맞았다.
KT는 1차전에서도 0-4, 4점 차 리드를 따라잡았다. 경기 초반이었기 때문에 추격 사정권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데스파이네가 4회 초, 안타 2개와 볼넷을 허용하며 만루 위기에 놓였다. 결국 투수 교체가 이뤄졌고, 위기에서 나선 심재민이 2타점 적시타와 땅볼 타점을 허용하며 추가 3실점했다. 승부의 추가 기운 순간이었다.
데스파이네는 올 시즌 4점(4.53)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이전 2년보다 부진했다. PS 선발진도 탈락했다. 결국 선발 투수가 무너진 상황에서 롱릴리버로 나서야 했다. 4일 휴식 뒤 등판을 선호하고, 투구 수도 가급적 100개를 맞추려고 할 만큼 루틴이 철저한 선수가 구원 등판했으니, 좋은 투구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고영표을 2차전에서 불펜 대기한 선택도 결과적으로 악수가 됐다. KT는 지면 벼랑 끝에 몰리는 2차전에서 선발 투수 벤자민에 이어 고영표를 투입할 계획을 세웠다. 신인 박영현이 8·9회 2이닝을 잘 막아준 덕분에 고영표가 나서지 않을 수 있었지만, 불펜 투구까지 미뤄야 했다. 고영표도 등판과 등판 사이 루틴을 철저하게 지키는 편. 한 보직에 고정되지 않은 게 3차전 부진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