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재(26·나폴리)는 한국 축구 팬에게 엄청나게 소중한 존재다. 그가 이탈리아 세리에A 1위팀 나폴리에서 주전 센터백으로 활약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새벽잠을 설쳐도 피곤하지 않다. 유럽 진출 사례가 거의 없었던 한국 수비수가, 그것도 수비 잘하기로 유명한 세리에A에서 최고 수비수 대접을 받고 있다니.
불과 3년 전까지도 일부 축구 팬은 그를 ‘진민짜이(김민재를 중국 발음으로 읽은 것)’라고 불렀다. 김민재가 자신을 이렇게 부르는 것에 대해 엄청난 거부감을 나타냈는데도, 포털사이트 댓글이 없어지기 전까지 김민재 기사에는 이런 댓글이 꼭 따라다녔다.
그 말 안에는 K리그에서 가장 돋보였던 뛰어난 수비 유망주가 중국 리그를 선택한 것에 대한 원망이 담겨 있었다. ‘나는 축구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순수한 팬이지만, 너는 돈만 좇는 수준 낮은 선수’라는 게 분노의 이면에 있었던 게 아닐까.
김민재는 그런 시선을 비웃기라도 하듯 중국에서 두 시즌 반만 뛰고 유럽으로 건너갔다. 튀르키예 리그에서 적응기도 필요 없이 가자마자 빛났고, 이번 시즌을 앞두고 나폴리로 옮겼다. 그리고 이번엔 더 빛을 내고 있다. 현지 언론과 팬들은 김민재를 ‘괴물 수비수’ ‘벽’ 같은 수식어를 붙이면서 극찬한다.
김영권(32·울산 현대)은 2017년 8월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최종예선 이란과 홈 경기(0-0 무승부) 후 인터뷰에서 “관중 소리가 크다 보니 선수들이 소통하기 힘들었다”고 말했다가 뭇매를 맞았다. ‘팬의 응원이 귀찮다는 거냐’ ‘경기를 못 한 변명이라기엔 어이가 없다’는 반응이 폭발했다. 러시아 월드컵 1, 2차전에서 한국이 연패하자 수비수들은 하나같이 집중포화를 맞았는데, 이때 김영권의 실언이 또 소환됐다.
김영권은 러시아 월드컵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독일을 상대로 결승 골을 넣었다. 독일을 2-0으로 이기고도 한국은 16강에 오르지 못했다. 그러나 축구팬은 독일을 격침한 선수들에게 열광했다. 김영권은 독일전 직후 울면서 인터뷰했다. “선수들이 정말 열심히 뛰었다는 걸 알아 달라”고 했다.
더 찾아보자면 사례는 차고 넘친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아르헨티나전에서 1-4로 패배한 후 수비수 오범석은 ‘왜 차두리 자리에 네가 나와서 경기를 망쳤냐’며 욕을 먹었다. 이 경기에서 골 기회를 살리지 못한 염기훈은 비하의 의미가 담긴 별명으로 조롱당했다. 어떤 수비수는 골을 내주면 ‘문신도 꼴 보기 싫다’는 비난이 난무하는 걸 겪어야 했다.
비단 최근에 생기기 시작한 일도 아니다. 인터넷 댓글이 없던 시절인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도 그랬다. 볼리비아전에서 여러 차례 골 기회를 날린 공격수 황선홍이 “은퇴해야 하나 심각하게 생각했다”고 말할 정도로 욕을 먹었다. 황선홍은 한국의 월드컵 첫 승을 이뤄낸 2002년 한일 월드컵 폴란드전 선제 결승 골의 주인공이다.
월드컵은 전 세계의 축구 축제다. 그리고 동시에 인터넷과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비난을 쏟아내는 '욕 잔치'가 되기도 한다. 역대 한국의 월드컵 본선 직후 분위기는 대부분이 ‘욕받이’를 찾아내는 마녀사냥의 장이었다.
벌써 10번째 월드컵 본선을 맞이한 한국의 축구 팬 문화가 이제는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이번에도 특정 선수 혹은 감독에 대한 욕설과 비난, 조롱으로 월드컵을 끝낸다면 훗날 부끄러워질 기억만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