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후는 최근 스콧 보라스(71)의 손을 잡았다. 보라스는 미국 메이저리그(MLB)에서 손꼽히는 대형 에이전트다. 게릿 콜(뉴욕 양키스) 앤서니 렌던(LA 에인절스)을 비롯해 MLB를 대표하는 슈퍼스타가 그의 고객이다. 지난해에는 제프 슈워츠·조엘 울프를 제치고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가 선정한 '가장 강력한 스포츠 에이전트'로 뽑히기도 했다. '코리안 몬스터' 류현진(LA 다저스)도 MLB 진출부터 지금까지 보라스의 관리를 받고 있다.
이정후는 올 시즌을 마치면 '1군 등록일수 7년'을 채워 포스팅 시스템(비공개 경쟁입찰) 자격을 갖춘다. KBO리그 최고 타자라고 불리는 만큼 MLB 진출 가능성이 커 보인다. 보라스와 에이전트 계약까지 마쳤으니 "대형 계약을 따낼 수 있다"는 장밋빛 전망이 쏟아지고 있다.
과연 보라스가 '꽃길'만 보장할까. 송재우 MLB 해설위원은 "(보라스가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지는) 반반인 거 같다. 보라스가 국내에 가장 많이 알려진 에이전트이고, 잘 나가는 것도 맞다. 좋은 조건을 얻어낼 수 있다는 평가가 있지만, (워낙 까다로워) 보라스와 접촉을 피하거나 그와 엮이는 걸 원하지 않는 구단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선수의 몸값이 떨어질 것으로 보이면 그 선수를 잘 돌보지 않는다는 평가도 있다"며 "보라스를 거쳐 간 한국 선수가 꽤 있지만, 류현진 정도를 제외하면 그를 떠난 선수가 많다"고 부연했다.
보라스는 MLB에서 입지전적 인물이다. 2019년 12월 72시간 동안 대형 FA(자유계약선수) 계약을 3건(콜·스티븐 스트라스버그·앤서니 렌던) 완료했는데 계약 총액이 무려 8억1400만 달러(1조240억원)였다. 그의 '업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실패 사례가 없는 건 아니다. FA 시장 흐름을 잘못 읽어 2019년 개막 두 달이 지날 때까지 댈러스 카이클의 소속 팀을 찾지 못했다. 카이클은 2015년 아메리칸리그(AL) 사이영상 수상자로 원소속팀 휴스턴 애스트로스에서 퀄리파잉 오퍼(1년 1790만 달러·225억원)를 받았지만, 이를 거절하며 다년 계약을 노렸다. 하지만 FA 시장 분위기가 차갑게 식으면서 보라스의 협상력도 통하지 않았다. 결국 카이클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 1년 1300만 달러(164억원)에 계약했다. 휴스턴의 퀄리파잉 오퍼 금액보다 낮은 연봉이었다.
2021년 1월에는 나성범(현 KIA 타이거즈)의 포스팅이 불발에 그쳤다. 당시 나성범은 이정후와 같이 '1군 등록일수 7년'을 채워 포스팅 시스템으로 빅리그 문을 노크했다. 2020년 타율 0.325 34홈런 112타점을 기록, NC 다이노스의 창단 첫 통합우승을 이끈 뒤였다. 2019년 무릎을 심하게 다친 이력이 있지만, 그가 자신 있게 MLB에 도전장을 내밀었던 배경에는 보라스가 있었다. 보라스의 영향력이라면 MLB 계약을 따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이정후가 보라스와 계약 전 조언을 구한 선배가 김하성(28·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이다. 김하성은 "(이정후가 보라스와) 계약하기 전에 (내게) 연락이 왔는데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결국 네가 여구를 잘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해줬다"고 밝혔다. 김하성의 에이전시는 ISE 베이스볼이다.
슈퍼 에이전트가 있더라도 선수의 상품 가치가 없으면 좋은 계약을 따내기 힘들다. 이정후가 2023시즌 어떤 성적표를 받아드느냐가 더욱 중요한 이유다. 그리고 이 내용을 누구보다 이정후가 잘 안다. 1월부터 미국에서 개인 훈련을 한 그는 현재 구단 스프링캠프를 소화하고 있다. 빠른 공을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타격 폼을 간결하게 수정하고 있다. '이정후의 야구'를 보여주기 위한 스텝업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