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에서, 카운트는 상대의 주먹에 쓰러지고 난 뒤 주심이 열까지 세는 것을 뜻한다. 또 상대의 주먹이 자신에게 날아오는 순간 되받아치는 기술을 뜻한다. 영화 ‘카운트’는 그 뜻과 닮았다. 맞고 쓰러져도 열까지 셀 동안 숨을 고르고 다시 일어나라 말한다. 날아오는 주먹을 끝까지 보고 받아치라 말한다. 사뭇 유쾌하고 감동적이다.
88올림픽 복싱 금메달리스트 시헌. 금메달은 화려한 과거지만 지워고픈 과거다. 10년이 지나 고향인 경남 진해에서 고등학교 선생님을 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미친개라고 불린다. 시헌은 어느날, 억지로 참석한 고교 복싱 대회에서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승부 조작으로 기권패를 당한 윤우를 보게 된다. 억울한 소년에게서 다른 의미로 억울한, 자신을 겹친다.
시헌은 손에서 내려놨던 글러브를 다시 잡는다. 아내와 교장선생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복싱부를 만든다. 복싱유망주 윤우와 양아치가 되기 싫어 복싱을 배우고 싶어하는 환주, 일진들에게 맞고만 사는 복안, 그리고 노는 민머리 3인방을 복싱부에 합류시킨다. 그렇게 시헌은 학생들과 함께 진짜 금메달을 찾아 떠난다.
'카운트'는 1988년 복싱 금메달을 땄지만 승부조작이란 억울한 누명을 썼던 박시헌 선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영화다. 차라리 은메달이었으면 좋았을 걸, 이라고 할 만큼 모두에게 손가락질을 받았던, 그래서 평생을 하리라 다짐했던 복싱을 놓아야 했던, 세상이 너무 억울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런 남자가 그래도 진 사람이 가장 억울하지 않겠냐고 토로하는 소년과 다시 복싱을 시작하는 이야기다.
권혁재 감독은 뻔할 수 있는 이 이야기를, 유쾌하고, 경쾌하고, 감동적으로 풀었다. 빠르게 풀었다. 각자 사연에 발목 잡히지 않는다. 그렇다고 캐릭터를 소진하지도 않는다. 캐릭터가 품은 이야기를, 스포츠영화 정석답게 전개하면서도, 속도있게 달린다. 영화는 3라운드 복싱경기와 닮았다. 크게 세 단락으로 나뉜다. 링 위에 선수들이 오르고 첫 라운드는 판정패에 가깝다. 두 번째 라운드는 많이 때리지만 많이 맞고 다운도 당했다. 세 번째 라운드는 열까지 카운트를 세기 전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일어나 어퍼컷을 날린다. 매 라운드 공이 울려 쉬어야 할 즈음에는 개성 넘치는 조연들이 맛깔 나는 웃음을 전한다. 그렇게 쉬게 한다. 속도 있게 달리고 쉬었다가 다시 달린다. 그렇게 심박수를 높인다. 이 리듬감이 매우 좋다. '카운트'의 가장 큰 매력은 이 리듬감이다.
시헌 역으로 첫 상업영화 주연을 맡은 진선규는 좋다. 적절한 웃음과 적당한 감동, 그리고 드라마를 앞에서 이끈다. 첫 주연으로 영화를 앞에서 이끄는 건 결코 쉽지 않은 법. 진선규는 '카운트' 맨 앞에 설 자격이 충분하다. 윤우 역을 맡은 성유빈은 미래를 더 기대하게 만든다. 옛된 얼굴이 아직 남아있지만 점점 남자의 매력이 드러난다. 복싱 연습에 얼마나 매진했을지, 자세만 봐도 알만 하다. 환주 역의 장동주는, 좋은 작품에서 한 번 더 보고 싶다.
‘카운트’는 ‘으랏차차 스모부’ ‘쿨러닝’ ‘국가대표’ 등 스포츠영화의 정석을 그대로 밟는다. 좌절한 주인공, 그 주인공과 같이 달리는 조금은 못난 동료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도전. 이 정석을 유쾌하고 감동적이며 빠르게 변주한다. 탄탄한 정석에 좋은 변주는, 기분 좋은 하모니를 만든다. ‘카운트’가 들려주는 하모니는 기분이 좋다.
2월22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109분.
추신. 실화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만큼, 에필로그가 인상적이다. 영화에 취했다면 감동적일 테고, 거리를 뒀다면 뻔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