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문 전 감독은 2021년 도쿄 올림픽 야구 대표팀 감독이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8전 전승 금메달 신화를 이끈 사령탑으로 도쿄 대회에서도 큰 기대를 모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일본, 미국, 도미니카공화국에 연이어 덜미가 잡혀 노메달로 대회를 마무리했다. 13년 만에 열린 올림픽 야구에서 '디펜딩 챔피언'의 자존심이 무너졌다. 특히 준결승에서 성사된 한·일전을 패해 결과가 더욱 뼈아팠다.
18일(한국시간) NC 다이노스 스프링캠프지를 방문한 김경문 전 감독은 본지와 인터뷰에서 "지난 대회(도쿄 올림픽)를 하면서 느낀 게 하나 있다"고 말했다. 김 전 감독은 NC 제1대 사령탑으로 2012년부터 2018년 6월까지 팀을 이끌었다. 전 소속팀을 격려하는 자리였지만, 국가대표 사령탑 경험이 누구보다 많은 만큼 오는 3월 열리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 대한 얘기도 빠지지 않았다.
김경문 전 감독은 "예전에는 상대를 해보면 일본이 긴장을 많이 했다. 부담도 많이 느꼈다. 그런데 우리나라 선수들이 어느 순간 FA(자유계약선수)도 하고 (큰) 돈을 받아보니까 혹시라도 못하면 (악플러들의) 공격이 들어오지 않나. 어느 순간 선수들의 부담이 늘었다"고 말했다.
포털 사이트는 2020년을 기점으로 기사 댓글을 폐지했다. 일부 악플러들은 선수 개인 소셜미디어(SNS)로 이동, 이른바 다이렉트 메시지(DM)로 욕설을 쏟아내고 있다. 공개되지 않는 은밀한 공간이다 보니 강도가 댓글보다 더 심할 수밖에 없다. 가족을 욕하는 내용까지 담겨 일부 선수는 고소를 진행하기도 한다. 특히 한·일전은 패했을 때 받는 스트레스가 극심하다.
김경문 감독이 우려하는 건 부담이 경기력에 미치는 영향이다. 도쿄 올림픽 준결승에서 한·일전 희비를 가른 건 실책성 플레이였다. 대표팀은 2-2로 맞선 8회 말 등판한 고우석(LG 트윈스)이 1사 1루에서 후속 곤도 겐스케(소프트뱅크 호크스)를 1루 땅볼로 유도했다. 1루 주자 야나기타 유키(소프트뱅크)를 2루에서 잡아내 아웃 카운트를 올렸지만, 1루 커버를 들어간 고우석이 제대로 베이스를 밟지 못해 병살타로 연결하지 못했다. 흔들린 고우석은 2사 1루에서 폭투와 볼넷 2개로 만루를 자초했고 야마다 데쓰토(야쿠르트 스왈로스)에게 통한의 싹쓸이 2루타를 허용했다. 고우석은 KBO리그를 대표하는 마무리 투수지만 한·일전의 부담 탓인지 크게 흔들렸다.
WBC에서 한국과 일본은 1라운드 B조에 속했다. 3월 10일 '일본 야구의 성지' 도쿄돔에서 B조 1위 자리를 놓고 맞대결한다. WBC 대표인 구창모(NC 다이노스)는 한·일전을 두고 "가위바위보도 지면 안 된다"고 말한다. 대표팀 대부분의 선수도 같은 마음이다. 도쿄 올림픽뿐만 아니라 최근 한·일전 결과가 유독 좋지 않다 보니 비장함이 더욱 강해졌다. 대표팀 훈련장에선 야마카와 호타카(세이부 라이온스) 야마다를 비롯해 각기 다른 악몽을 안겨준 일본 선수를 향해 설욕을 다짐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공교롭게도 일본은 이번 대회 우승 후보일 정도로 전력이 막강하다. 오타니 쇼헤이(LA 에인절스) 다르빗슈 유(샌디에이고 파드리스)를 비롯해 최정예 멤버로 최종 엔트리를 꾸렸다. 대회를 앞두고 '라이벌 관계'가 부각되면 대표팀의 부담도 커질 수 있다. 양현종(KIA 타이거즈)은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타협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대회를 앞둔 결연한 각오를 전했다.
김경문 전 감독은 "부담을 갖지 말라고 해서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선수들이 그게(부담) 조금 많이 생겼다. 적당한 부담은 괜찮은데 심하면 역효과"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