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야구위윈회(KBO) 이사회에서 전년도 우승팀 감독이 WBC 지휘봉을 잡기로 했다. 2008년 통합 우승 팀은 SK 와이번스(현 SSG 랜더스)였다. 당시 SK 지휘봉을 잡고 있던 김성근 감독이 건강이 좋지 않은 이유로 대표팀 사령탑을 고사했다.
당시 필자는 한화 이글스 사령탑으로 마무리 훈련을 지휘하던 중이었다. 고(故) 하일성 사무총장이 대전으로 내려오더니 "1회 대회에 이어 이번 대회에도 대표팀 사령탑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처음에는 거절했다. 필자 역시 2006년 뇌경색 진단을 받은 뒤 건강이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하일성 총장은 사령탑 선임이 난항을 거듭하자 다시 필자를 찾아와 간곡히 요청했다. 당시 이런 내용이 언론을 통해 퍼져나갔다. 숙소에서 야구장까지 걸어 다니는데, 거리에서 만난 대전 시민들이 "WBC 잘 다녀오세요"라며 날 응원하더라.
그래서 하일성 총장을 만나 딱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2006년 WBC 대표팀 코치진이 2009년 대회에서도 같은 보직을 맡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1회 대회 선동열 투수 코치 (삼성 라이온즈) 김재박 타격 코치 (LG 트윈스) 조범현 배터리 코치(KIA 타이거즈)는 프로팀 지휘봉을 잡고 있었다. 하 총장이 '걱정마라'고 약속해 사령탑을 맡았는데, 이들 모두 대표팀 코치진 합류를 고사했다. 며칠 뒤 기자회견 때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국가가 있어야 야구도 있다"고 말했다. 결국 류중일(전 LG 감독)을 제외한 나머지 코칭스태프의 얼굴이 싹 바뀌었다.
2회 대회 준우승을 거두는 데 코치들의 역할이 컸다. 아주 수고가 많았다. 선수들도 좋았다. 마운드에선 봉중근과 정현욱, 타선에선 추신수와 김태균 이범호의 활약이 돋보였다. 대표팀의 하와이 합숙 훈련 때 이전부터 어깨 부상을 겪은 박진만이 결국 제외됐다. 그대 대표팀이 다 같이 모여 '박진만이 부상으로 내일 돌아간다'고 작별인사를 했다. 대신 합류한 박기혁이 굉장히 수비를 잘했다. 선수와 코치 모두에게 이번 칼럼을 통해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
첫 경기서 대만을 9-0으로 꺾었지만, 다음 경기인 일본전에서 선발 투수 김광현의 컨디션 난조로 2-14 콜드 게임 패배를 당했다. 그래도 중국(14-0 승)과 다시 만난 일본을 1-0으로 꺾고 A조 1위로 미국으로 향했다.
WBC는 2회 대회에서 더블 일리미네이션 방식과 1위 결정전을 도입했다. 독특한 운영 방식에 따라 한국은 일본과 무려 5차례나 맞붙었다. 이후 일본과 1승 1패를 더 주고받은 대표팀은 베네수엘라와 준결승에서 10-2로 이겼다. 선발 투수 윤석민이 6과 3분의 1이닝 2실점으로 잘 던졌다. 당시 베네수엘라는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면 연봉 1000만 달러 이상 받는 선수들이 대거 나왔는데 우리가 손쉽게 격파했다.
그리고 결승에서 일본을 만났다. 이 대회에서만 5번째 맞대결이었다. 1-3으로 끌려가던 8회 말 이대호의 희생 플라이로 1점을 따라갔고, 9회 말 2사 1·2루에서 이범호가 다르빗슈 유를 상대로 안타를 때려 극적인 동점을 만들었다. 연장 10회 초 2사 2·3루 수비, 타석에는 스즈키 이치로가 들어섰다. '이치로를 걸러 1루로 내보내라'고 사인을 줬다. 이때 '작전 미스'가 있었다.
요즘에는 심판에게 자동 고의사구 의사를 전달하면 된다. 하지만 당시에는 볼 4개가 판정 나야 타자가 1루로 걸어 나갈 수 있다. 방법은 두 가지였다. 포수가 아예 일어서서 공을 받거나, 포수가 앉아 있는 상황에서 투수가 스트라이크존을 완전히 벗어나게 던지는 것이다. 그때 후자를 선택했다. 임창용이 8구 대결 끝에 이치로에게 2타점 결승타를 내줘 3-5로 졌다.
포수가 일어나서 받도록 확신한 사인을 줬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감독으로서 큰 실수였다. 산전수전 다 겪은 임창용이라도 3루에 주자가 있는 상황에서 일부러 볼을 던지는 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후배 지도자들에게 꼭 강조하고 싶다. 타자와의 승부를 피하고 싶다면, 자동 고의사구 의사를 확실히 전달하는 게 좋다. 어떤 상황에서든 좀 더 세밀하고 확실한 사인을 전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