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오후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B조 본선 1라운드 체코와 한국의 경기에 앞서 이강철 한국대표팀 감독이 상대 감독과 심판진과 이야기를 마친 뒤 더그아웃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지난 1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최종 엔트리가 발표했을 때 한 가지 눈에 띄는 특징이 있었다. 조범현 한국야구위원회(KBO) 기술위원장과 이강철 WBC 야구대표팀 감독은 투수 엔트리를 15명으로 꾸리면서 10명을 '선발 자원'으로 채웠다. 심지어 왼손 5명(김광현·김윤식·양현종·이의리·구창모)은 모두 선발 투수였다. 불펜으로 최종 엔트리에 이름을 올린 건 고우석과 정우영(이상 LG 트윈스) 이용찬(NC 다이노스) 김원중(롯데 자이언츠) 정철원(두산 베어스)뿐이었다.
대회 규정을 곱씹어보면 의외의 선택일 수 있었다. WBC는 투수 보호 차원에서 라운드마다 투구 수가 제한된다. 1라운드에선 선발로 등판하더라도 최대 65구만 소화할 수 있다. 이닝당 투구 수를 평균 15개로 가정하면 5회를 넘기기 쉽지 않다. 그뿐만 아니라 투구 수에 따라 휴식일까지 보장해야 해 불펜 운영이 복잡하다. 이강철 감독은 투수 선발 배경에 대해 "첫 경기 호주전에 강할 수 있는 선수들 위주로 뽑았다. 투구 수 제한이 있으니 선발, 중간, 마무리 없이 중요한 순간에 투수를 기용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선발 투수가 '진짜 선발' 역할을 할 수 있는 건 투구 수 제한이 약간 풀리는 1라운드 이후(8강 최대 80개, 4강 이후 최대 95개)였다.
선발 투수를 과도하게 뽑은 건 결과적으로 '독'이 됐다. 대표팀은 1라운드를 시작하기도 전에 마무리 투수 고우석이 전열에서 이탈했다. 고우석은 지난 6일 열린 오릭스 버팔로스와 연습경기에서 목에 담 증세를 느꼈다. 검진 결과 큰 문제가 아닌 것으로 발표됐지만 1라운드 최대 분수령이었던 호주(9일)와 일본(10일)전 모두 결장했다. 자칫 무리했다가 더 큰 부상으로 연결될 수 있으니 벤치에서 무리하게 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고우석이 빠지면서 불펜에서 활용할 수 있는 '전문 불펜'은 4명으로 줄었다. 말 그대로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10일 오후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B조 본선 1라운드 한국과 일본의 경기. 5회말 무사 상황에서 일본 곤도에게 솔로홈런을 허용한 한국 원태인이 아쉬워하고 있다. [연합뉴스]
투구 수 제한이 있는 대회 특성상 불펜이 한 박자 빨리 가동될 수밖에 없었다. 호주전에선 선발 교영표가 4와 3분의 1이닝을 소화한 뒤 불펜 자원으로 6명이 마운드를 밟았다. 일본전에서는 김광현이 2이닝 만에 강판당하고 불펜 9명을 투입하는 졸전을 펼쳤다. 두 경기를 마친 뒤 양현종(KIA)과 구창모(NC)를 비롯해 컨디션이 좋지 않은 몇몇 투수들이 이강철 감독의 구상에서 사실상 제외됐다. 선발 투수의 '롱릴리프' 활용마저 실패하면서 마운드에 과부하가 걸렸다. 단기전에선 컨디션이 좋은 투수만 집중적으로 기용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표팀은 '컨디션이 좋은' 투수마저 적었다.
일본전 마지막 투수로 등판했던 박세웅이 하루 휴식 후 체코전 선발을 맡았다. 중국전 선발은 호주와 일본전에서 중간 계투로 나서 투구 수 55개를 기록한 원태인이다. 2019년 1군에 데뷔한 원태인은 2020년 이후 불펜 등판이 단 한 번에 그친다. 그만큼 선발에 특화된 선수지만 불펜으로 2경기를 뛰고 이틀 휴식 후 중국전 선발을 맡았다. 선발을 10명이나 뽑았지만 'B조 최약체' 중국전을 뛸 투수가 없다. 몇 되지 않는 전문 불펜 자원인 김원중과 정철원은 1라운드 첫 3경기를 '개근'했다. 야구계 안팎에선 "대표팀 투수 운영 방향을 모르겠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WBC 3회 연속 1라운드 탈락이라는 성적표를 받아든 한국. 최종 엔트리 구성부터 문제가 없었는지 체크할 필요한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