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한일전을 앞둔 오후 6시 20분, 이용규(키움 히어로즈)의 전화기가 울렸다. 스마트폰 화면에 찍힌 이름은 이정후. 무슨 일이 있나 싶어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넘어 들려온 첫 마디는 “형 저 긴장돼요”였다.
경기 40분 전을 앞두고 걸려온 전화. 9일 호주전 패배로 한일전 승리 혹은 분위기 전환이 반드시 필요했던 대표팀의 모든 선수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매 경기 포커페이스로 시원한 안타를 때려내던 이정후도 마찬가지. 마음을 완전히 진정시키지 못한 그가 전화를 건 상대는 이용규였다.
이용규는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부터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2009년 WBC 준우승, 2015년 프리미어12 우승 등 태극마크를 달고 수 년간 활약하며 굵직한 성적을 낸 전설의 외야수. 풍부한 경험이 있는 그에게 이정후가 SOS를 청했다.
14일 시범경기 고척 KT전을 앞두고 취재진과 만난 이용규가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이용규는 “그때 시간이면 선수들이 라커룸에서 경기를 준비하고 있을 시간인데, (이)정후가 긴장을 많이 했는지 전화가 오더라”며 “정후에게 ‘하던 대로, 자신 있게 해’라고 이야기했다”라고 전했다.
이정후가 한일전 선발 다르빗슈 유(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공략법까지 물어봤다는 후문. 이용규는 2009년 WBC에서 다르빗슈를 상대한 적이 있다.
이에 이용규는 웃으면서 “14년 전에 맞붙었는데 기억도 안난다. 당황했다”라면서도 “내가 거기 있었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편하게 얘기해줬다. 당시 느린 슬라이더(슬러브)가 좋았던 기억이 있다. 빠른 카운트에 빠른 것만 생각하고 쳤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라고 말했다.
아쉽게도 한국 대표팀은 호주전과 일본전 패배를 극복하지 못하고 WBC 1라운드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대표팀 선배로서 이를 지켜본 이용규도 착잡했을 터. 이용규는 “응원했는데 아쉬웠다. 나도 2017년 WBC 1회전 탈락의 아픔을 겪으면서 결과에 대한 무게감과 죄책감을 잘 알고 있다”라며 씁쓸해 했다.
이어 그는 “선수들이 느낀 것이 있을 것이다. 더 노력하고 발전해야 한다. 개개인의 능력이나 실력을 키워서 (해외 선수들이 던지던) 그런 볼들을 구사할 수 있는 투수들이 많이 나와야 하고, 이를 상대하면서 이겨내는 타자들도 많이 나와야 한다”라면서 “그래야 국제대회에서 당황하지 않고 빠르게 대처할 수 있다. 나도 많이 반성했지만 선수들 개개인의 노력도 중요한 것 같다”라며 후배들을 격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