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가 허공을 가르고, 일본 배터리가 포효하는 순간, 마이크 트라웃(31·LA 에인절스)은 고개를 위아래로 짧게 끊어 움직였다. 공을 공략하지 못한 자책과 패배감이 엿보였다. 마운드 위에는 오타니 쇼헤이(29)가 있었다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우승은 일본이 차지했다. 22일(한국시간)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론디포 파크에서 열린 미국전에서 3-2로 신승을 거뒀다.
선발 투수 이마나가 쇼타가 2회 초 트레이 터너에게 솔로 홈런을 맞았지만, 이어진 공격에서 선두 타자로 나선 무라카미 무네타카가 미국 선발 메릴 켈리로부터 동점 홈런을 쳤고, 이어진 만루 기회에서 땅볼 타점으로 역전했다. 4회 말 공격에선 오카모토 카즈마가 카일 프리랜드를 상대로 달아나는 솔로 홈런을 쳤다. 이후 일본 리그 최고 구원 투수들이 나서 7회까지 추가 실점 없이 막았고, 8회 나선 다르빗슈 유가 카일 슈와버에게 1점 홈런을 맞았지만, 3-2에서 마운드에 오른 오타니가 실점 없이 리드를 지켜내며 마운드 위에서 일본의 우승을 맞이했다.
미국과 일본의 결승전이 성사된 순간부터 메이저리그(MLB) LA 에인절스에서 함께 뛰고 있는 오타니와 트라웃 사이 맞대결에 기대감이 높아졌다. 오타니가 선발 투수로 나서지 않아, 투·타 대결이 성사될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였다. 두 슈퍼스타 중 누가 자국을 우승으로 이끄는지 만으로도 빅 이벤트였다.
베네수엘라와의 8강, 쿠바와의 4강에서 삼진 5개를 당하며 부진했던 트라웃은 1회 초 2루타를 치며 손맛을 봤다. 하지만 후속타는 없었다. 오티나는 7회 타석에서 내야 안타를 쳤지만, 후속 요시다 마사타카가 병살타를 치며 득점하지 못했다. 여기까지는 두 선수의 무대가 마련되지 않았다.
1-3으로 지고 있던 미국은 8회 초 1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나선 '거포' 슈와버가 구원 등판한 '선발' 투수 다르빗슈에게 솔로 홈런을 치며 1점 차로 추격했다. 이어진 상황에서 추가 득점은 없었지만, 일본도 8회 말 공격에서 득점에 실패했다. 미국이 홈런 1개만 치면 경기는 원점이 되는 상황이었다.
9회 초 오타니가 마무리 투수로 나섰다. 6회부터 불펜과 더그아웃을 오가며 바쁘게 움직였던 그였다. 기어코 가장 완벽한 피날레를 장식할 기회를 얻었다.
오타니는 선두 타자 제프 멕네일에게 볼넷을 허용했다. 미국의 홈구장이나 다름없는 론디포 파크가 들끓었다. 하지만 후속 무키 베츠에게 2루 땅볼을 유도, 야수진이 더블 플레이를 해내며 단순에 아웃카운트 2개를 잡아냈다.
후속 타자가 트라웃이었다. 비로소 야구팬 모두가 기다리던 승부가 펼쳐졌다. 아메리칸리그(MVP) 최우수선수(MVP)만 3번이나 차지한 현역 최고 타자 트라웃과 투·타 겸업으로 규정타석과 이닝을 채우고 두 자릿수 승수와 30홈런을 한 시즌에 동시에 달성한 전대미문 플레이어 오타니. 같은 팀 소속이었기에 공식전 맞대결 기록이 한 번도 없었던 두 선수가 최고의 무대, 가장 극적인 상황에서 만난 것이다.
승부는 공 6개로 갈렸다.
오타니는 초구로 88마일(시속 141㎞/h) 스위퍼를 가운데 낮은 코스에 던졌다. 낮은 코스에 극강인 트라웃을 상대로 스트라이크존 아래쪽에 거의 걸치는 공을 던졌다. 도발이자 자신감으로 봐도 과하지 않았다.
3구는 다시 100마일 직구였다. 바깥쪽(우타자 기준) 보더라인에서 공 1개 정도 빠졌다. 트라웃은 반응하지 않았다. 이어진 4구는 마치 2구 리플레이 같았다. 다시 100마일 가운데 직구. 트라웃의 배트가 또 늦었다.
이 승부는 풀카운트가 됐다. 앞선 4구와 달리 오타니의 직구가 바깥쪽 낮은 코스로 크게 빠졌다. 포수 나카무라 유헤이가 잡지 못할 정도였다. 102마일(시속 164㎞/h)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풀카운트에서 오타니가 선택한 구종은 초구와 같았다. 스위퍼. 하드 슬라이더로 불리는 이 구종은 수평 움직임과 수직 움직임이 모두 큰 편이다. 일반적인 슬라이더보다는 구속이 느리다.
승부가 갈렸다. 궤적은 가운데에서 바깥쪽으로 빠졌고, 공은 트라웃의 배트가 아닌 포수 미트와 만났다. 경기 종료.
트라웃은 직구를 노렸을까. 왼발(앞발)을 들어 올리는 속도가 앞서 헛스윙 했던 직구 공략 타이밍보다 더 빠른 것처럼 보였다. 빠지는 공을 대처하기 위해 뒤늦게 콘택트 하려는 느낌도 있었지만, 준비하는 타이밍은 빨랐다.
오타니는 풀카운트에서 바깥쪽 변화구를 선택했다. 나카무라가 바깥쪽으로 빠져 앉아 미트를 댔다. 트라웃 정도 되는 타자가 스트라이크존에 들어오는 직구를 3개나 놓칠 가능성은 낮았다.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5구째 바깥쪽 크게 빠진 볼은 6구 스위퍼를 구사하기 위해 보여준 공, 즉 빌드업으로 볼 수도 있었다.
투수와 타자 모두 월드클래스가 만났다. 첫 승부라면 투수가 유리하다는 야구 속설이 있다. 오타니는 풀카운트에서 트라웃이 배트를 끌어낼 수밖에 없는 공을 던졌다. 트라웃이 직구를 노렸다면, 일본 배터리가 스위퍼를 결정구로 선택한 순간 갈렸다고 볼 수도 있다.
1구, 1구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던 승부. 오타니는 경기 뒤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트라웃과의 승부에서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단호한 결의로 나섰고, 완벽하게 이겼다. 트라웃은 "1라운드는 오타니의 승리"라며 설욕 의지를 감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