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미중 패권 분쟁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3년 만에 중국을 찾았다. 중국을 겨냥한 미국의 반도체 공급망 흔들기로 입장이 난처한 가운데 글로벌 파트너십에 흠집이 나지 않도록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26일 삼성전자에 따르면 이재용 회장은 지난 24일 중국 톈진에 위치한 삼성전기 사업장을 방문해 전자부품 생산 공장을 둘러보고 현지에서 근무하는 임직원과 간담회를 가졌다.
이 회장이 중국을 방문한 것은 지난 2020년 5월 산시성 삼성전자 시안 반도체 사업장 이후 처음이다.
이번 출장의 목적은 27일까지 열리는 중국발전고위급포럼 참석이다. 팀 쿡 애플 CEO(최고경영자)·알버트 불라 화이자 CEO·크리스티아노 아몬 퀄컴 CEO 등 내로라하는 글로벌 기업 경영진 100여 명이 중국 중앙부처 지도급 인사 등과 만났다.
이 회장은 이에 앞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측근 중 한 명인 천민얼 톈진시 서기와 면담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이 회장은 지난 25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사업과 관련한 현안을 묻자 "북경(베이징) 날씨가 너무 좋지요?"라며 말을 아꼈다.
이 회장은 최근 깊은 고민에 빠졌다. 핵심 반도체 생산라인인 중국을 상대로 미국이 각종 견제 장치를 설치하면서 미래 투자에 제한이 걸렸다.
미국 반도체지원법이 대표적이다. 자국에 반도체 공장을 세우는 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대신 중국·러시아·이란 등 이른바 안보 우려국가에 기준 이상으로 투자하면 보조금을 반환하는 조건을 내걸었다.
기술 수준이 낮은 레거시 반도체는 생산 능력을 10%까지, 첨단 반도체는 생산 능력을 5%까지만 확대할 수 있도록 했다. 완전 봉쇄가 아니라서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지만, 최소한의 투자만 가능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중국은 한국의 최대 교역국 중 한 곳이라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에 낸드플래시 공장을, 쑤저우에 후공정(패키징)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이에 이번 방중은 이 회장이 직접 현장 경영을 펼치며 중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반도체지원법 리스크 해소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이번에 이재용 회장은 2021년 가동을 시작한 삼성전기 톈진 MLCC(적층세라믹캐피시터) 생산라인을 살펴봤다. 미중 국력 다툼의 중심에 있는 반도체 공장은 방문할 계획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기 톈진 공장은 부산사업장과 함께 글로벌 시장에 IT·전장용 MLCC를 공급하는 주요 생산 거점 중 한 곳이다.
삼성은 부산을 MLCC용 핵심 소재 연구·개발 및 생산을 주도하는 '첨단 MLCC 특화 지역'으로 육성하는 한편, 톈진은 전장용 MLCC 주력 생산 거점으로 지속 운영할 계획이다.
MLCC는 전자 회로가 안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전류 흐름을 일정하게 조절하고 부품 간 전자파 간섭을 막아주는 핵심 부품이다. 대부분 전자제품에 들어가 '전자산업의 쌀'로 불린다. 일본 업체들이 글로벌 시장의 약 60%를 점유하고 있다.
이재용 회장은 삼성전자·삼성디스플레이·삼성전기·삼성SDI 소속 톈진 지역 주재원 및 중국 법인장들도 만나 해외 근무 애로사항을 경청했다.
최근 수년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중국과 한국 간 인적·물적 교류가 제약을 받는 상황 속에서도 톈진을 비롯한 중국 지역 주재원 및 임직원은 공급망 차질 최소화에 주력해 왔다는 평가다.
톈진에는 삼성전기 MLCC·카메라모듈 생산 공장, 삼성디스플레이 스마트폰용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모듈 생산 공장이 위치하고 있으며, 삼성SDI는 중국 톈진에서 스마트기기·전기차 등에 사용하는 2차 전지를 생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