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 영국 등은 소련과 연합군을 이뤄 나치 독일에 맞서 싸웠다. 비록 이들은 사유재산제에 바탕을 둔 자본주의와 공유재산제의 공산주의라는 대립되는 이념을 믿는 국가였지만, 공동의 적에 맞서 동맹을 맺은 것이다.
1944년 영국과 소련정부는 두 국가의 친선을 증진시킬 목적으로 축구 경기 개최를 처음 계획했다. 1945년 5월 8일 나치 독일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했고, 유럽에서 전쟁은 끝났다. 마침내 그해 10월 영국과 소련은 축구 경기 개최에 합의했다. 하지만 냉전의 시작을 앞두고 당시 두 나라는 의혹과 적대감이 증폭되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잉글랜드축구협회(FA)는 1945년 소비에트 챔피언이었던 FC 디나모 모스크바를 초청했다. 하지만 디나모는 스탈린의 비밀 경찰 조직이었던 NKVD의 지원을 받는 클럽이었고, 이들은 영국으로 떠나기 전 자본주의 클럽에 패배하면 안된다는 특명을 받았다. 더불어 디나모가 질 경우 시베리아로 6개월 간 선수들을 유배 보낸다는 영국 언론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디나모의 영국 도착 날짜는 계속 연기되었고, 그 사이 디나모 소속이 아니지만 실력이 좋은 선수들이 팀에 속속 합류했다. 실제로 이들은 디나모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소련 국가대표팀이었다. 소련 정부가 스포츠를 정치적, 외교적 목적으로 사용한 첫 사례가 바로 디나모의 영국 방문이었다.
11월 런던에 도착한 디나모 선수단은 파란색 코트를 입은 채, 손에는 어두운 천으로 감싼 특이한 가방을 들고 있었다. 이에 영국의 일부 음모론자들은 이들이 원자폭탄을 밀반입했다고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방에 든 것은 식료품이었다. 당시 영국의 식량 배급제를 인지하고 있던 선수단이 그들이 먹을 음식을 갖고 온 것이었다.
디나모의 지속적인 일정 변경으로 FA는 이들이 숙박할 호텔을 예약할 수 없었다. 이에 런던에 도착한 첫날 선수단은 왕립 기마 근위대의 막사를 배정받았다. 시트와 베개가 없는 맨 침대에 실망한 선수들은 그곳에 머무는 것을 거절하고 소련대사관으로 향했다. 이런 소식을 들은 런던의 많은 시민들은 대사관을 찾아가 선수단에 자신의 집을 숙소로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냉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인 당시만 하더라도 2차 세계대전때 나치 독일과 싸우느라 엄청난 인명 피해를 본 소련 국민들이 영국에서 인기 있었기 때문이다.
런던에 도착한 디나모 선수단은 14개의 요구사항을 내걸었다. 그중에는 소련대사관에서만 식사할 것이라는 요청도 있었다. 독살당하는 것을 두려워했던 선수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외에 소련 심판이 한 경기의 주심을 맡아야 한다는 것, 아스날과의 경기는 꼭 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했다. 런던까지 와서 아스날과 경기하지 않는 것은 “피라미드를 보지 않고 카이로를 방문하는 것과 같다”는 논리였다.
FA는 이들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으나, 토요일 오후 경기를 하는 것은 거절했다. 전통적으로 토요일은 잉글랜드에서 자국 리그 경기가 열리는 날이기 때문이다. 결국 수익을 양국이 50대 50으로 나누기로 합의했고, 첫 경기의 상대는 첼시로 정해졌다.
전쟁기간 정기적인 축구 경기가 없었고, 전시 동맹국에서 온 수수께끼 같은 팀에 대한 호기심이 더해 영국인들은 디나모와의 경기에 큰 관심을 보이게 된다. 11월 13일 첼시의 홈구장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열린 경기는 공식적으로 7만4496명의 관중이 몰린 가운데 게이트가 닫혔지만, 많은 사람들이 경기장에 진입했다. 팬들은 관중석 지붕을 포함해 경기를 볼 수 있는 모든 공간에 몰려들었다. 실제 이날 경기를 관람한 관중은 무려 10만~12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킥 오프 전 디나모 선수단은 친선의 표시로 첼시 선수들에게 꽃다발을 선물한다. 소련 리그에서는 일반적인 예의였지만, 이를 처음 접한 첼시 선수들과 관중들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오늘이 첼시의 장례식이라는 건가?”라고 소리친 관중도 있었다.
디나모는 능수능란한 패스를 앞세워 경기 초반을 지배했다. 하지만 첼시는 이 경기에 대비해 불과 일주일 전에 에버튼에서 영입한 잉글랜드의 대표 공격수 토미 로튼이 있었다. 그의 활약에 힘입어 첼시는 전반을 2-0으로 리드했다.
후반 70분까지 첼시는 리드했으나 연달아 2골을 허용해 동점이 됐다. 그 후 첼시는 로튼의 강력한 헤더로 다시 앞서 나가나, 몇 분 후 보브로프에게 실점해 결국 경기는 3-3으로 끝났다. 사실 보브로프의 동점골은 오프 사이드에 가까웠다. 이에 항의하던 로튼에게 주심은 “외교적인 이유”로 결정했다고 말한다.
이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디나모가 이날 보여준 멋진 패스와 빠른 움직임에 잉글랜드 팬들은 깊은 인상을 받았다. 경기가 끝나자 피치에 몰려든 관중들은 몇몇 디나모 선수들을 들어올려 무등을 태운 장면까지 연출했다. 이들의 경기력에 영국 언론의 찬사가 쏟아진 가운데, 디나모의 영국 투어는 계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