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이었다. 선수 생활을 마감한 윤희상(38)은 휴식 없이 곧바로 인천 남동구 구월동에 작은 가게를 열었다. 청춘을 바친 SK행복드림구장(현 SSG랜더스필드)으로부터 차로 10분 남짓한 거리. 멀지 않은 곳에서 그의 두 번째 야구 인생이 시작됐다. 최근 본지와 만난 윤희상은 "글러브를 정말 좋아해서 한번 만들어보고 싶었다. 도전하는 마음으로 하고 있다"며 웃었다.
◇취미가 새로운 직업으로
윤희상은 'SK 원클럽맨'이다. 2004년 데뷔해 통산 42승을 기록했다. 2012년 한국시리즈 1차전 선발로 등판한 적도 있다. 2013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선 태극마크를 달았다. 한때 "SK 왼손은 김광현, 오른손은 윤희상"이라는 얘길 들었다. 그랬던 그가 글러브 제작·판매 업체 '유니 컬렉터블'을 세워 3년째 운영 중이다.
윤희상은 "처음엔 주위에서 '네가 어떻게 브랜드를 만들어서 팔아?'라고 많이 걱정하더라. 취미로만 해야 하나 고민도 많았다"며 "처자식이 있으니까 마음대로 할 수 없지 않나. 그런데 아내(이슬비 씨)가 '후회할 일 하지 말고 하고 싶으면 해봐'라고 하더라. 그렇게 해서 이 일을 시작했다"고 돌아봤다.
선수 시절 윤희상의 취미는 글러브 해체였다. 그는 "원정 경기를 가면 술을 마시거나, 다른 선수들처럼 PC방을 다니지 않았다. 손을 다칠까 봐 장갑을 끼고 커터 칼로 글러브를 다 뜯고 길들이는 게 취미였다"며 "글러브를 조각내 모눈종이에 스케치해보기도 했다. 그걸 본 (김)광현이나 (최)정이나 (김)성현이는 '그럴 바에야 그냥 직접 만들어보라'고 하더라. '글러브 만들면 내가 사용해줄게'라고 하는 선수들도 있었다"고 말했다.
과거 영광을 함께한 동료들은 든든한 지원군이다. 샘플을 만들거나 의견을 들을 때 도움을 준다. 김광현은 메이저리그(MLB) 첫 시즌이던 2020년 '유니 글러브'를 착용하고 스프링캠프를 소화했다.
◇"쪽팔리게 뭐하고 있냐?"
윤희상의 글러브는 주문 제작 제품이다. 인터넷 발주가 많지만, 가게를 찾는 손님도 꽤 있다. 처음엔 모든 게 어려웠다. 11세에 야구를 시작해 20년 넘게 야구만 했던 그에게는 손님 응대부터 난관이었다.
윤희상은 "처음 가게를 열었을 때는 글러브도 별로 없는 텅 빈 곳이었다. 유튜브 구독자도 3명(3일 기준 1750명)이었나. 가게 홍보를 하는데 주변에서 '쪽팔리게 뭐하냐'고 하더라. 가게에서 혼자 점심 먹다가 손님이라도 오면 정말 민망했다. 좋아서 이 일을 하는 건데 나 자신이 초라하기도 했다"며 "(엄)정욱이 형은 돈을 아무리 줘도 답답해서 여기 못 있겠다고 하더라.(웃음) 손님이 많으면 힘들기도 하지만, 지금은 가게에 있을 때가 가장 편하다"고 말했다.
글러브는 100% 수작업이다. 가죽 종류는 크게 소(스티어)와 송아지(킵)으로 나뉜다. 프로 선수들은 착용감이 부드러운 송아지 가죽의 글러브를 사용한다. 윤희상은 주문이 들어오면 손 모양과 손목 각도, 손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도안을 만든 뒤 장인(匠人)과 소통하면서 제작한다.
그는 "만들어진 걸 보고 괜찮다 싶으면 선수에게 주고 그게 아니면 다시 수정한다. 그 단계를 몇 번 거쳐야 완성품이 만들어진다"며 "(선수와 장인 사이에서) 이야기를 전달하는 게 재밌다. 원하던 형태의 글러브가 나왔을 때는 즐거움이 크더라. 글러브 제작은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지만, 만드시는 분이 혼자여서 하루에 2~3개 정도만 가능하다. 그래서 (주문이 들어오면) 대기 기간이 있다"고 설명했다.
◇"어깨가 건강했으면 어땠을까"
윤희상은 팀 동료에게 짐이 된다고 생각한 순간 은퇴를 결정했다. 그는 "아파서 그만둔 거라서 크게 미련은 없다. 투수는 상관관계처럼 서로 도와줘야 하는데 어린 선수들이 나 때문에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결심했다. 이 정도면 오래 했다"며 시원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어깨가 건강하게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생각은 한다. 훨씬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지 않았을까"라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신인 윤희상은 '파이어볼러'였다. 프로 2년 차이던 2005년 최고 구속이 153㎞/h. 그는 "155㎞/h가 목표였다. 1이닝 3실점 하고 강판당해도 152㎞/h를 기록했다는 게 너무 행복해 일기장에 쓰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시련은 예기치 못한 순간 찾아왔다. 2006년 오른 어깨에 칼을 댄 것이다. 병명은 슬랩(SLAP·관절와순병변)이었다. 어깨 수술을 하면 야구 인생이 끝난다는 인식이 많았던 시기. 실제 윤희상의 재활 치료 기간은 꽤 길었다. 1군에서 본격적으로 공을 다시 던진 건 2011년이었다. 그는 "4년 동안 재활 치료를 하고 군대까지 다녀왔는데 아파서 못 던지겠더라. 타자로 (전향)해야 하나 고민도 했다"며 "김성근 감독님이 SK에 부임한 뒤 '안 아프게 던질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만들어내는 게 프로'라고 하시더라. 엄청 크게 와 닿아서 그때부터 안 아프게 던지는 걸 연구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윤희상은 통증을 참고 던졌다. 매년 건강검진을 받으면 의사마다 '안 아파요?'라고 되물었다. 어깨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정신력으로 버텼다. 그 결과 2012년 개인 첫 10승을 따내기도 했다. 버티고 버티던 어깨는 2019년 투구를 멈췄다. 두 번째 어깨 수술(회전근개 인대 손상)을 받은 뒤로는 회복하지 못했다. 석회화가 진행돼 뼈에서 인대가 떨어져 나갔다.
2020년 초인적인 힘으로 잠시 1군에 복귀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윤희상은 "5경기를 선발로 나간다고 하면 선택을 해야 했다. 2경기를 전력으로 던지고 3경기는 살살 던져야 어깨가 회복됐다. (시즌 초반인) 4~6월에는 '지금 세게 던지면 시즌이 끝날 수 있다'는 불안감이 항상 있었다"며 "주변에서는 '왜 세게 안 던지냐'고 많이 그랬다. 그럴 때마다 '내 어깨 상태에서 정말 최선을 다하는 거'라고 얘길 했다. 항상 그랬다"고 돌아봤다.
◇"글러브 1만개를 만들고 싶다"
윤희상의 성실함을 잘 아는 구단에선 코치직을 제안했다. 하지만 거절했다. 윤희상은 "(코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안 올지 모른다. 주변에서도 기회가 왔을 때 잡으라고 그러더라.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게 기회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며 "더 경험하고 사회와 부딪혀서 몸으로 느껴야 할 게 훨씬 많다. 야구 선수로서 경험하지 못했던 걸 지금 하는 셈이다. 다시 저 생활(야구장)로 돌아간다면 거기서도 물론 배울 게 있지만 아직은 아닌 거 같다"고 말했다.
어렵게 실현한 꿈을 조금 더 키우는 게 꿈이다. 그는 "글러브 1만개를 제작하고 여러 글러브를 착용도 해본 뒤 자체 공장이 있는 브랜드를 만들어보고 싶다. '유니 글러브'의 대표가 되고 공장을 차린 뒤 장인들을 모셔서 한 곳에서 만드는 거다. 천천히, 그리고 길게 보고 이 일을 하고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