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현미(본명 김명선)가 4일 별세했다. 향년 85세. 최근까지 방송을 통해 시청자들을 만나왔던 현미의 갑작스러운 비보에 팬들의 충격이 커지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이날 오전 9시37분쯤 서울 용산구 이촌동 자택에 현미가 쓰러져 있는 것을 팬클럽 회장 김모씨(73)가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현미는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안타깝게 숨을 거뒀다.
현미는 지난 1957년 스무살의 나이에 ‘여대생 가수’라는 타이틀과 함께 현시스터즈로 데뷔했다. 이후 솔로 가수로 나서면서 재즈팝 장르를 부르며 1960년대부터 톱가수로 우뚝 섰다. 히트곡 ‘밤안개’를 내놓은 뒤에도 ‘보고 싶은 얼굴’(1963), ‘떠날 때는 말없이’(1964), ‘무작정 좋았어요’(1966), ‘몽땅 내사랑’(1967), ‘별’(1971) 등을 연달아 선보이며 큰 사랑을 받았다.
우리나라 대표 디바로 불렸던 현미는 국민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으나,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 현미가 부른 ‘밤안개’, ‘아, 목동아’ 등 다수의 히트곡을 작곡한 고(故) 이봉조와는 슬하에 아들 2명을 자녀로 뒀으나 사실혼 관계를 유지했다.
현미는 지난해 10월 TV조선 ‘스타다큐 마이웨이’에 출연해 이봉조와 관련해 “나의 은인이요, 스승이요, 애인이요, 남편이요”라고 말했다. 현미는 “26살에 이봉조가 유부남인 줄 어떻게 알았겠나. 임신 8개월이 됐을 때 이봉조가 딸 두 명이 있는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본처에게 보냈다”고 고백했다.
깊은 아픔을 털어놨던 현미는 그럼에도 이봉조의 생전 영상을 보며 눈물을 쏟아내기도 했다. 현미는 1987년 영상을 보며 “나랑 헤어졌을 때”라며 “‘내가 이렇게 불쌍하게 살고 있는데 네가 안 받아줄 거냐’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그래서 찾아가서 ‘건강하게 다시 살자’고 하려 했는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나. 운명이 거기까지밖에 안 됐나 보다”라고 안타까워했다.
현미는 이봉조와 이별한 뒤 무려 40년을 홀로 생활했다고 밝혀 안타까움을 자아내기도 했다. 이봉조와의 사이에서 낳았던 두 아들은 모두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으며, 이날 비보를 듣고 급거 귀국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1938년생으로 평안남도 평양 출신인 현미는 1951년 1.4 후퇴를 계기로 남한으로 내려왔다. 현미는 “물이 얼어야 건너갈 수 있는데 피난민들이 전날 얼음이 깨져서 다 떠내려갔다고 하더라. 얼음이 얼 때까지 기다리면서 사상결단으로 왔다”고 회고했다.
2남 6녀였던 현미는 당시 북한에 두 동생을 남겨두고 피난올 수밖에 없었다는 가족사를 밝히기도 했다. “동생들이 그때 4살, 6살이라서 잠시 할머니 댁에 맡겼는데 갑자기 피난길에 올랐다. 동생들을 데려올 시간이 없었다”며 그리움과 함께 이산가족의 아픔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