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부터 서울 중구 소재 한화 그룹 본사 앞에선 트럭 시위가 한창이다. 한화 이글스 팬들이 야구단 프런트에 뿔이 났다. 한화팬은 그동안 야구단 성적과 상관없이 너그럽고 긍정적인 응원 문화를 보여줬다. ‘보살팬’이라고 불린 이유다. 그런 한화팬이 야구단을 비판하는 문구를 트럭 LED 전광판에 쏟아내며 분노하고 있다. 이례적인 일이다.
발단은 프런트가 최근 단행한 인사. 한화는 지난 11일 대전 삼성 라이온즈전이 끝난 뒤 2021시즌부터 지휘봉을 잡았던 카를로스 수베로 감독을 경질하고, 최원호 퓨처스팀 사령탑과 정식 계약(기간 3년) 했다고 발표했다.
한화팬은 경질 방식과 타이밍을 꼬집고 있다. 한화는 4월까지 6승 1무 17패로 최하위에 그쳤지만, 5월 첫 6경기에서 4승(2패)을 거두며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수비로 감독 경질이 발표된 11일 삼성전에서도 4-0으로 승리했다. 승장에게 전해진 이별 통보, 그것도 후임 계약까지 바로 발표된 것을 두고 ‘무례하다’는 시선이 지배적이었다.
프런트 수뇌부는 야구단이 2할 대 승률에 그치고 있던 4월 중순부터 새 감독 선임에 돌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구단주의 승인이 떨어진 시점과 야구단이 상승세를 탄 시기가 겹친 것이다. 프런트 입장에서 인사에 명분을 부여하기 위해 수베로호가 고꾸라지길 기다릴 순 없었을 것이다. 수베로 감독을 향한 한화팬의 여론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거센 역풍이 프런트를 향하고 있다. 예상을 웃도는 기류에 내부적으로 당황하고 있다.
한화팬의 성토는 그저 이별 방식과 타이밍 문제로만 볼 수 없을 것 같다.
일단 책임론. 한화는 2020시즌이 끝나고 팀 베테랑 선수 정리를 단행, 리빌딩 기조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이를 이끌 책임자로 영입한 게 수베로 감독이다.
한화는 2021·2022시즌 모두 최하위(10위)에 그쳤다. 하지만 노시환·김인환·김기중 등 젊은 선수들의 성장세는 두드러졌다. 이게 한화 프런트가 수베로 감독에게 맡긴 임무였다. 하지만 ‘느리게 걷기’를 자처한 한화가 갑자기 성적이 안 좋다는 이유로 시즌(2023) 개막 50여 일 만에 감독을 경질했다. 리빌딩 기조를 전면에 내세우며 지난 2년을 무의미하게 만든 프런트는 책임을 지지 않고, 그저 현장에 책임을 전가했다.
문동주·김서현 두 특급 유망주들의 가파른 성장세를 보면 자신감이 생긴 걸까. 한화 프런트는 갑자기 팀 기조를 ‘윈-나우(win-now)’로 바꿨다. 새 감독에게 ‘내년부터는 이기는 야구를 해야 한다’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그럴 거면 지난 시즌(2022)이 끝나고 진작 수베로 감독과의 동행을 끝냈어야 했다.
최원호 신임 감독의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 '프런트 사람'이라는 오해 속에 부임해 일부 한화팬의 차가운 시선을 받고 있다. 손혁 한화 단장과 최 감독이 동서 지간이라는 점도 이런 반감을 더했다.
최 감독은 공부하는 야구인으로 알려져 있다. 인망 높은 지도자로도 인정받는다. 하지만 그도 아직 정식 감독으로는 검증된 게 없다. 그런데 '성적을 내기 위해 선택한 감독'이라는 꼬리표가 생겼다. 신임 감독의 부담감이 커졌다.
그동안 야구는 못해도 팬과의 소통이나 마케팅에서는 인기 구단다운 행보를 보여줬던 한화. 승리를 통해 돌아선 팬심(心)을 되돌릴 수 있다고 믿는 건 더 큰 오판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