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년 동안 성인가요계에는 많은 스타들이 탄생했다. 트롯 경연대회 입상자들이 대부분인데 많은 방송 노출 덕택에 50대 이상 성인가요 팬들 사이에서 전국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스타들이 많이 나온 반면에 새로운 히트곡은 거의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게 이들 신흥 트롯스타들의 특징이다. 경연대회 내내 선배들의 예전 히트곡들만 부른 것은 물론 입상 후 출연한 프로그램에서도 자신의 신곡보다는 선배들의 명곡 위주로 선곡해 노래한 탓이다.
방송사나 가수들이나 성인가요 팬들이 잘 아는 노래를 소개하면 안정적인 시청률을 확보할 수 있다. 나이 든 시청자들은 젊은 시절 좋아하던 노래를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는데 TV를 틀기만 하면 좋아하던 노래를 원곡 가수의 곡보다 더 좋은 음질로 들을 수 있으니 신날 수밖에 없고 출연 가수들의 지명도는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히트곡 없는 가수의 인기가 얼마나 가겠는가. 자신의 히트곡이 없는 대부분의 경연대회 출신 가수들은 자신이 불러 히트시킬 만한 신곡을 찾느라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요즘 이런 경연대회 출신 가수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인물이 있다. 작곡가보다는 편곡가로 더 유명한 70대 중반의 노장 뮤지션 정경천이다.
정경천은 트롯 경연에서 가수들이 많이 부르는 노래 중 하나인 나훈아의 ‘어매’(오재호 작사)와 유지나의 ‘미운 사내’(나훈아 작사), 진성의 ‘지나야’(나훈아 작사) 등의 작곡가로 유명하다. 지난 3월 장구의 신이라 불리며 스타가 된 박서진에게 직접 작곡하고 편곡까지 한 신곡 ‘춘몽’(한시윤 작사)을 제공하면서 다시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박서진이 부른 ‘춘몽’과 ‘지나야’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자 이번에는 ‘최연소 해남’ ‘울산의 손자’로 불리며 유명해진 고정우 소속사에서 신곡을 만들어달라는 요청이 왔다. 최근 고정우가 선보인 ‘탱자탱자’(자운영 작사)와 ‘조선 로맨스’(한시윤 작사) 등 신곡들을 작곡했다.
정경천은 가수 박군(박준우)에게도 신곡 ‘사랑꾼’과 ‘청춘’을 제공해 레코딩을 준비하고 있다.
박서진에 이어 고정우가 발표한 신곡이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자 스타급 경연대회 출신 가수들로부터 신곡을 달라는 요청이 쇄도하는 바람에 정경천은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지난 2021년 정감 넘치는 목소리로 ‘인생 라면’(이건우 작사)이라는 자작곡을 정차르트라는 예명으로 발표해 호평을 듣기도 한 정경천은 원래 가수 지망생이었다. 1948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한국전쟁 당시 1.4후퇴 때 형과 누나를 따라 월남했다. 대구의 한 고아원에서 살다가 먼저 월남한 부모와 재회해 서울로 이주했다.
중학생 때 공부가 싫어 국악원에 들어가려고 피리를 배워 응시했으나 떨어졌다. 이번에는 가수가 되겠다면서 남일해와 남진의 스승인 한동훈 선생을 찾아가 노래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동훈 선생이 녹음해 들려준 자신의 노래를 들어보고 자신의 목소리와 노래에 너무 실망해 가수의 꿈을 포기했다. 그리고선 한동훈 선생에게 작곡과 편곡 기법을 새로 배우기 시작했다. 또 종이에 건반을 그려 피아노 연주법도 독학으로 익혔다.
한동훈 선생은 정경천에게 “너는 한 가지를 가르치면 백 가지를 안다. 음악에 소질이 뛰어나다”고 칭찬을 했다. 21세 때 리타 김이 취입할 노래를 작곡했는데 한동훈 선생이 “편곡도 네가 하라”고 해 편곡까지 하게 됐다.
그 후 한동훈 선생이 작곡한 곡들을 도맡아 편곡하면서 편곡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펼치기 시작해 지금까지 어림잡아 8000곡 이상 편곡했을 것으로 추산한다. 편곡에 집중하느라 작곡한 곡들은 20여곡밖에 되지 않는다. 편곡한 노래 중 가장 유명한 곡은 진성의 ‘안동역에서’(김병걸 작사·최강산 작곡)였다. 진성이 원래 2008년 불렀던 곡인데 2012년 진성이 제작자와 함께 찾아와 새로 편곡해달라고 요청해 해줬고 곡이 완성되기 무섭게 인기를 끌었다.
작곡한 노래 중에서 가장 인기를 끈 곡은 ‘어매’였다. 원래 40여 년 전에 작곡해 정경천이 밤무대에서 피아노를 치며 직접 노래하던 곡이었다. 그렇게 야간업소에서 부르던 노래를 나훈아의 매니저 하중아씨와 작곡가 박성규가 듣고 좋다면서 하중아씨가 악보를 가져가더니 1993년 나훈아가 발표해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경연대회 출신 신흥 트롯스타들이 작곡가로 뒤늦게 전성기를 맞은 이 75세 노 뮤지션의 신곡을 받으려고 몰리는 것은 자신들을 좋아해 주는 성인가요팬들의 취향과 감성에 어울리는 노래들을 만들어주기 때문으로 분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