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수에게 ‘영웅’이라는 새로운 수식어가 생겼다. 그라운드의 ‘악동’이라 불리던 그가 이제 ‘영웅’으로 불리게 됐다. 이천수가 슬리퍼를 신은 채 빗 속을 뚫고 1km를 달려가 음주 뺑소니범을 잡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이제 그를 영웅이라 부르고 있다.
지난 5일 경찰 등에 따르면 이천수는 바로 전날인 4일 늦은 오후 서울 동작역 부근 올림픽대로에서 음주 사고를 내고 도망가던 뺑소니범을 직접 잡아 경찰에 인계했다. 당일 촬영을 마치고 귀가하던 이천수는 정체 중인 올림픽대로에서 노령의 택시 기사가 “저 사람 좀 잡아달라”라고 호소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당시 음주 운전자는 택시와 추돌 사고를 낸 뒤 차량을 두고 도주한 상태였다.
이천수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차에서 내려 도망가는 남성을 뒤쫓았다. 당시 이천수는 슬리퍼 차림이었다. 그의 매니저도 함께 쫓기 시작했다. 이날 서울엔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으나 이천수는 올림픽대로를 1km가량 달려 음주운전자를 붙잡았다. 현장 상황을 고려하면 대단한 용기를 낸 것이다.
이후 이천수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처음에는 (도망가는 사람이) 앞에 보이는데 못 잡겠더라. 음주운전인지 뭔지 모르고 나이 드신 분이 좀 다급해 보이기에 그날따라 무슨 정의력이 살아났는지 갑자기 뛰어가게 됐다”라고 후일담을 밝히기도 했다.
조금은 웃픈 이야기도 있다. 이천수는 경찰이 자신을 범인으로 착각하자 ‘저 아니에요’라며 손사래를 치며 해명했다고 한다. 심지어 아내마저도 그다음 날 아침 기사를 보고 “오빠 무슨 사고 쳤어?”라고 이야기했다고 하니, 평소 이천수의 ‘악동’ 이미지가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어쩌다 이천수는 ‘악동’ 이미지가 되었을까.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인 이천수는 스페인 라리가와 네덜란드·일본 무대를 거쳐 인천 유나이티드 FC 등에서 활약했다. 작은 체구에 뛰어난 스피드, 거기에 발재간과 정교한 킥 능력으로 아시아 원톱이라 불리며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그만큼 논란도 많았다. 어깨가 탈구되는 부상으로 선수교체가 되면서 나가는 도중, 서포터즈의 도발에 손가락 욕으로 화답을 하거나, 2002년 월드컵 당시 상대편 선수 뒷통수에 사커킥을 날리기도 했다. 전남 드래곤즈와 FC서울의 경기에서는 자신이 넣은 골이 오프사이드 판정을 받자 심판에게 ‘주먹감자’를 먹이고 총쏘기를 하는 등 본인 스스로도 ‘FC불나방’이라 표현할 정도였다.
이천수가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한 건 은퇴 이후 방송, 유튜브 등에 출연하면서부터다. 특히 개인 유튜브 채널 ‘리춘수’에서 K리그와 한국 축구를 향한 애정 가득한 콘텐츠로 축구팬들의 지지를 얻었다. 여기에 아내와 함께 ‘살림남’ 등에 출연하며 ‘가장’ 이천수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렇게 서서히 대중에게 ‘과거엔 악동이었지만, 지금은 할 말 다하는 유쾌한 아저씨’로 이미지가 변해가던 중 음주 뺑소니범을 잡으면서 완벽하게 이미지 역전에 성공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천수는 내달 4일 TV조선 ‘조선체육회’ 방영을 앞두고 있다.
‘조선체육회’는 현역 시절 최고의 레전드 겸 ‘악동’이라 불린 스타들이 모여 ‘2023 황저우 아시안 게임’을 중계하는 프로그램. 선공개 영상에서 이천수는 경기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손흥민’을 ‘손홍만’, 황인범은 ‘황인배’로 오현규는 ‘오영규’로 절묘하게 잘못 불러 허당기를 드러내 웃음을 자아냈다.
‘조선체육회’ 제작진은 “음주운전 뺑소니범을 잡고 ‘영웅’이 된 이천수의 허당미와 인간적인 매력을 볼 수 있다”고 전했다. 악동에서 영웅 그리고 또 다음 이천수를 대표하는 키워드는 무엇이 될지, 그의 행보에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