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자꾸 폭력의 피해자를 연기하게 된다. 드라마 ‘더 글로리’에 이어 영화 ‘비닐하우스’로 돌아온 배우 안소요 이야기다.
또 한 번 지독한 폭력의 흔적을 지닌 캐릭터로 돌아온 안소요를 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상처와 아픔을 꾹꾹 눌러담아 선연한 눈빛으로 표현해냈던 ‘더 글로리’ 속 경란과 달리 ‘비닐하우스’ 속 순남은 무척이나 천진난만하다. 어쩐지 그런 면이 더 서늘하게 느껴지지만.
“경란이는 생각이 많은 아이였던 것 같아요. 자신이 했던 실패를 다시 하지 않으려고 하고, 그것이 방어벽을 만들고요. 순남 역시 방어벽과 경계심이 심한 인물이지만 한편으론 그런 것들을 쉽게 허물기도 하거든요. 계산해서 행동하기보다는 순간의 감정과 감각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인물이기 때문 아닌가 싶어요.”
‘비닐하우스’는 겹겹이 쌓인 폭력에 대한 영화다. 집이 없어 비닐하우스에서 사는 문정(김서형)은 아들과 함께 살 제대로 된 집을 구하기 위해 간병인으로 일을 한다. 힘들지만 굳건히 살고자 했던 문정. 치매를 앓고 있는 노인을 돌보다 그만 사고가 일어나고, 문정의 인생엔 큰 파고가 닥친다.
순남은 문정이 심리상담을 받으며 만난 인물이다. 경계성 지적 장애를 가진 순남은 문정의 삶에 천연덕스럽게 달라붙는다. 김서형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연기할 장면이 많았던 안소요는 “고개를 돌려서 나를 좀 바라봐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아마 ‘비닐하우스’ 속 순남이 문정에게 느꼈던 기분이리라.
순남은 굉장히 다층적인 캐릭터다. 성폭행에 노출돼 자해를 한 그는 명백히 폭력의 희생자다. 한편으로 그는 또한 폭력의 가해자이기도 하다. 폭력적인 시스템 속에서 의도 없이 누군가에게 폭력을 가하게 되는 삶. 안소요는 그런 순남이 산에서 마주친 들개처럼 무서우면서도 한편으론 귀여웠다고 했다.
“어릴 때 산에서 들개를 마주친 적이 있었거든요. 몰골이 진짜 꾀죄죄했어요. 그 개가 저한테 막 오는 거예요. 처음엔 무서웠는데, 그 개가 저한테 적의가 없다는 걸 알곤 꼬리를 흔들기 시작했어요. 그걸 보고 ‘귀엽다’고 생각하면서도 만지기는 무서웠거든요. 순남에게 접근하는데 그 이미지가 떠오르더라고요.”
그런 순남의 이미지를 외적으로도 구현하기 위해 안소요는 곳곳에 공을 많이 들였다. 특히 의상은 안소요가 직접 자신의 것을 가져와 입었을 정도다. 그는 어릴 때부터 할머니랑 같이 살아서 빈티지한 옷들이 많다고 했다.
“각각 따로 보면 예쁜 옷들을 마구 조합해서 입었어요. 왠지 순남이라면 ‘이거 예쁘니까 입어야지’, ‘이거 예쁘니까 신어야지’ 할 것 같더라고요. 그렇게 마음대로 조합해서 입었는데 감독님이 좋아하셔서 그렇게 가게 됐죠.”
‘더 글로리’ 이후 또 한 번 쉽지 않은 캐릭터를 연기해낸 안소요. 그는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다. 어떤 작품이든 내게 오면 충실히 임할 것”이라면서도 “사실 ‘비닐하우스’ 같은 작품을 보면 마음이 두근거린다”며 웃음을 보였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 때 그 이유가 한 가지인 경우가 많이 없잖아요. 보통 복합적인 동기와 감정이 얽혀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고, 그런 복합성을 가진 인물들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 같아요. 순남은 내적인 감정들을 남들보다 조금 더 투명하게 드러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영화를 보시면 많은 생각이 드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