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선징악의 서사는 여전히 유효할까? 선과 악이 분명히 나뉘어 싸우고, 우여곡절 끝에 선이 이긴다는 권선징악은 그 많은 대결과 갈등을 다루는 드라마의 단골 메시지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 단순한 선악구도와 권선징악의 이야기는 점점 공감대를 잃어가고 있다. 너무 단순한 서사에 대한 싫증 때문이기도 하지만, 현실이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는 현 대중의 변화된 인식 때문이기도 하다.
새로 시작한 tvN 토일드라마 ‘아라문의 검’은 2019년 방송됐던 ‘아스달 연대기’의 시즌2에 해당하는 후속작이다. 시즌1이 생각만큼 대중적 성공을 거두지 못하면서 시즌2가 가능할까 여겨졌지만, 4년의 시간을 거쳐 돌아왔다. 대신 배우가 바뀌었다. 송중기와 김지원이 각각 연기했던 은섬과 탄야 역할을 이준기와 신세경이 연기한다. 그만큼 시즌제 제작이 쉽지 않은 한국드라마의 현실이 담겨있는 선택이지만, 다행스럽게도 시청자들은 그다지 이물감을 토로하고 있지는 않다. 그만큼 이준기와 신세경이 역할을 잘 소화하고 있다는 뜻이다.
사실 ‘아스달 연대기’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분명한 선악구도를 보여줬다. 선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던 와한족 사람들과 그를 이끄는 은섬이었다면, 악은 일찍 문명을 세워 정복전쟁에 나선 아스달 사람들과 그를 이끄는 타곤(장동건)이었다. 타곤의 부대에 의해 와한족 사람들의 평화는 끝장나고, 그들은 아스달로 끌려와 노예의 삶을 살아간다. 은섬은 이들을 해방시키려 다른 씨족들을 규합하면서 아고족의 수장이자 재림 이나이신기로 불리며 세력을 불려 나가고 조금씩 아스달과 타곤을 압박해 들어온다. ‘아라문의 검’은 바로 이 아스달과 아고족의 대결이 전쟁으로 비화되는 벌판 전투로 시작한다.
은섬과 타곤의 대결구도는 분명한 선악구도를 이루지만 ‘아라문의 검’은 그렇게 단순한 서사를 깨는 새로운 요소를 심어 놓았다. 그것은 바로 ‘문명’이다. 자연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아가던 와한족 사람들은 아스달에 끌려와 힘겨운 노예의 삶을 살았지만, 그 속에서 조금씩 문명에 동화되어 간다. 그리고 문명은 그들에게 부와 권력 같은 욕망을 깨워 놓는다. 이를 상징하듯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탄야의 아버지인 열손(정석용)이다. 이름에 담겨있는 것처럼 남다른 손재주를 타고난 이 인물은 청동기술은 물론이고 해족이 가진 철기기술까지 섭렵하는 격물사(과학자)로 성장한다. 철로 된 무기를 가진다는 건 세상을 정복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는 의미라는 걸 타곤도 또 열손도 알고 있다. “철검의 무서움은 강한 게 아니라 값싸고 흔한 것입니다. 청동으로 무장시킬 수 있는 병사가 천 명이라면 철은 만 명입니다. 철의 시대엔 만 명, 10만 명이 전장에서 싸울 겁니다. 저밖에 못 합니다. 뭘 해주시겠습니까? 왕이시여.” 열손은 부와 권력을 원하게 되고 타곤은 기꺼이 과학과 기술을 담당하는 궁리방의 총괄관리자인 좌솔 자리를 내준다.
게다가 그는 재림 이나이신기가 되어 아스달로 진격해오고 있는 은섬을 위협으로 생각한다. 과거의 인연이 드러나면 자칫 아스달에 적응해 살아가는 자신 같은 와한족 사람들이 위험해질 수 있다고 여기는 것. 하지만 그건 자신들이 겪고 욕망하면서 갖게 된 문명의 달콤함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에서 생겨난 보호본능이다. 그래서 열손은 은섬이 은밀히 보낸 사람들을 죽인다. 그 말을 들은 탄야는 깜짝 놀라지만, 탄야 역시 과거의 그가 아니다. 아사신의 직계 혈통으로서 흰산족 사람들을 밀어내고 대제관의 자리에 앉은 탄야는 이제 종교를 통해 막강한 부와 권력을 갖게 된다. 타곤과 대적하기 위해 가진 부와 권력이지만, 어디 욕망이 초심을 생각할까. 타곤과 맞서는 탄야의 모습은 어딘가 닮아있다. 문명의 세계에서 국가권력과 종교권력으로 대립하는 두 사람은 정치 싸움의 대결을 앞두고 있다.
‘아라문의 검’이 선사에서 역사로 넘어가는 국가의 탄생기를 그리고 있으면서도, 지금의 대중에게 흥미롭게 느껴지는 건 바로 이 ‘문명’이 야기하는 욕망의 문제를 담음으로써 단순한 선악 대결 구도를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건 수천 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문제다. 어찌 보면 현 지구촌이 마주한 위기의 첫 발자국이 바로 그 때 시작된 것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