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예랑 리코 에이전시 대표가 반문했다. '이도류(투·타 겸업)'로 2023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우승과 최우수선수상(MVP)을 차지하고, 미국 메이저리그(MLB)에서도 정상에 선 오타니 쇼헤이(LA 에인절스)를 보며 '한국에는 왜 이런 선수가 없을까'라는 시선에 대한 이 대표의 질문은 이랬다.
"왜 안된다고 생각해요?"
이는 끊임없이 반문하며 도전한 그의 인생과도 맞닿아 있는 주제였다.
“왜 안돼?”로 시작한 K-보라스
이정후(키움 히어로즈) 김현수(LG 트윈스) 양의지(두산 베어스) 등. KBO리그를 대표하는 선수들 계약을 담당하며 ‘슈퍼 에이전트’로 유명해진 이예랑 대표지만, 이 타이틀을 얻기까지 수많은 “안 돼”와 싸워야 했다. 20대 중반의 나이에 아나운서에 도전했을 때도, 서른이 넘은 늦은 나이에 스포츠 에이전트를 도전했을 때도 모두가 그를 말렸다. 여기에 “에이전트는 남자도 하기 힘들어”라는 편견도 이어졌다. 노력 끝에 에이전트가 된 후에도 여자인 그가 롱런할 거라고 믿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럴 때마다 이예랑 대표는 “왜 안돼?”라고 반문하며 오기를 품었다. 마음을 더 굳게 먹고 치열하게 준비했다. 야구 규칙과 규정 공부는 기본. 선수와의 소통 방식부터 선수가 착용하는 장비까지 면밀하게 연구하면서 선수의 마음을 사기 위해 노력했다. 2014년엔 MLB 관계자들을 만나기 위해 무작정 미국을 찾기도 했다. 대부분 백인 남자들이 주를 이루는 윈터미팅(시즌 뒤 구단 관계자들과 에이전트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낯선 한국 여성은 당당히 명함을 돌리며 자신을 소개했다.
이러한 노력 끝에 이예랑 대표는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꿨다. 이 대표는 2016년 김현수(당시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MLB 진출을 이끌어내며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이후 이 대표는 양의지, 이정후 등 초대형 선수들과 손을 맞잡으며 KBO리그에서 손꼽히는 에이전트가 됐다. MLB의 유명한 에이전트의 이름을 딴 ‘한국의 스캇 보라스’라는 별명도 얻었다.
“저한테는 ‘안 돼’라는 건 없어요. 세상엔 무조건적인 단점은 없다고 생각하니까요.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땐 ‘여자’라는 시선과 프로 야구단에서 일한 경험이 없는 ‘일반인’이라는 부정적인 시선도 있었어요. 하지만 워낙 치열하게 살다 보니 그런 시선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요. 진입장벽이 있었지만, 그 벽을 넘는 쾌감으로 더 열심히 했어요. 오기로 버텨내는 것 같아요.”
K-오타니, “왜 안돼?”
'한국의 오타니'에 대한 생각도 "왜 안돼?"에서 시작된다. “오타니가 한국에서도 나오지 못할 이유가 있나요?”라고 반문한 그는 “요즘 어린 선수들을 보면 피지컬(신체)이 상당하다. 재능도 뛰어나고 발전 가능성도 크다”라면서 “한국에서도 충분히 세계적인 선수가 나올 수 있다”라고 자신했다.
이어 이예랑 대표는 “어린 선수들을 위해 구단과 리그 차원의 지원이 더 필요하다. 아마추어 지원은 물론이고, 이들을 가르치는 지도자들을 위한 환경 개선도 필요하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2023년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에 등록된 아마추어 야구 선수는 1만1458명(403팀). 고교 야구 선수는 3694명에 이른다. 그에 반해 등록된 고교야구 지도자 수는 306명(스포츠지원포털 기준). 한 사람당 12명의 선수를 지도하고 관리해야 한다는 뜻이다. 포지션도 다르고, 신체 능력이나 생각도 다양한 선수들을 지도할 코치들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 이에 이예랑 대표는 “인력 보강이나 코치들 처우 개선 등을 통해 어린 선수들이 체계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이예랑 대표는 또 해외 진출 제도가 유연하게 바뀌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KBO리그는 해외에 다녀온 아마추어 선수가 2년 동안 드래프트에 참가할 수 없고, 모교가 5년 동안 지원금을 받지 못하는 규정이 있다. 해외 무대에 도전하려는 어린 선수가 짊어지는 짐이 너무 크다”라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오타니는 일본프로야구(NPB)에서 5시즌만 뛰고 미국에 진출했다. 오타니의 해외 진출 요구를 소속팀(닛폰햄 파이터스)이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지원하면서 계약이 성사됐다. 덕분에 오타니는 전성기를 MLB에서 보낼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당초 오타니는 2014년 고등학교 졸업 직후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계획이었으나, 닛폰햄이 오타니의 이도류 도전과 향후 포스팅(비공개 입찰) 시스템을 통한 MLB 진출을 약속하면서 NPB에 먼저 입성했다. 이후 구단은 약속을 지켰고, 2018년 오타니가 빅리그에 입성했을 때 나이는 24세에 불과했다.
이예랑 대표는 "KBO리그의 포스팅 조건은 7시즌이다. 대졸 선수들은 고졸 선수들보다 4살 더 많지만 조건(7시즌을 뛴 후 해외 진출)이 같다. 아무리 빨라도 30대가 다 돼서야 해외에 진출할 수 있다”라면서 “오타니처럼 세계적인 선수의 탄생을 원한다면 해외 진출을 위한 제도도 조금 유연하게 바뀌었으면 한다”고 제안했다.
이예랑 대표는 자신을 소위 ‘국뽕(국수주의)’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며 웃었다. 유학 시절 소니·혼다 광고 일색이었던 뉴욕 타임스스퀘어가 삼성·LG 등 한국 기업 광고가 등장해 뿌듯해했던 그는 스포츠에서 손흥민(토트넘 홋스퍼) 김연경(흥국생명) 류현진(토론토 블루제이스) 같은 세계적인 스타가 꾸준히 나왔으면 한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그는 “K-POP이라는 말이 나오기까지도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나. 안 된다는 고정관념과 싸우며 수십년간 노력을 한 끝에 해냈다. 스포츠, 야구도 할 수 있다”라면서 “에이전트들도 그저 ‘선수 편’이 아닌 한국야구가 발전하길 원하는 ‘동반자’로서 노력하겠다. ‘한국의 오타니’가 나올 수 있도록 힘쓰겠다”라고 말했다.
◆이예랑 리코에이전시 대표 한국의 스포츠 에이전트. 2015년 김현수를 MLB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마이너리그 거부권 포함 2년 700만 달러 계약을 성사한 것을 시작으로 유명세를 탔다. 2019시즌엔 양의지를 KBO리그 FA(자유계약선수) 계약 역대 2위의 금액(4년 125억원)으로 NC 다이노스에 입단시킨 데 이어, 2020시즌엔 안치홍을 KBO리그 최초의 옵트 아웃(선수가 계약 도중 옵션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 조항을 포함해 롯데로 이적시키며 '슈퍼 에이전트'의 호칭을 얻었다. 이 대표는 테니스(권순우), e스포츠(LOL 기인) 등으로 범위를 넓혀 에이전트 생활을 활발하게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