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는 무시됐고, 명확한 철학도 없었다. 위르겐 클린스만(독일) 전 축구대표팀 감독을 선임했던 결과가 처참한 실패로 끝난 이유였다. 그러나 클린스만 사태를 겪고도 대한축구협회(KFA)는 변한 게 없다. 새 국가대표 전력강화위원회가 꾸려지기도 전에 감독 후보군의 실명이 내부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클린스만 감독의 선임은 KFA의 감독 선임 프로세스가 완전히 무너졌다는 게 축구계 공통된 지적이다. 정몽규 KFA 회장은 “파울루 벤투 감독 선임 때와 같은 프로세스로 진행했다”고 해명했지만, 전력강화위원들조차 발표 30분 전에 통보받는 등 사실상 정 회장의 독단적인 선임이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클린스만 전 감독은 지난해 3월 취임 기자회견 당시부터 정 회장과 오랜 친분을 과시했다. 클린스만은 지난달 독일 매체 슈피겔과 인터뷰에서 정 회장으로부터 직접적인 연락을 받아 감독이 됐다는 취지로 말했다. 감독으로서의 커리어나 전술적인 역량 등에 대한 비판과 우려에도 선임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클린스만 선임 과정을 다시 돌아보고, 무너진 시스템을 재정비하는 건 그래서 더 중요하다. 그래야 제2의 클린스만 사태, 정상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선임되는 사례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철저한 검증은 물론, 명확한 철학과 방향성을 가지고 감독을 뽑을 수 있는 프로세스를 구축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클린스만 경질 전후 KFA 분위기를 살펴보면 변화의 의지조차 감지되지 않는다. 새로운 전력강화위를 꾸려 차기 감독 선임 절차를 진행하겠다던 정몽규 회장의 다짐과 달리, 이미 차기 감독 후보군의 실명이 거론되고 있다. 충분한 논의를 거치고 탄탄한 근거에 기반해 도출된 결론이 아니라 일단 후보부터 추리고 그 정보가 노출돼 버렸다. 후보 선정 단계부터 또 정상적인 절차가 뒷전인 셈이다.
더욱 황당한 건 KFA 내부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후보군의 다수가 K리그 ‘현직’ 감독들이라는 점이다. 홍명보 울산 HD 감독과 김기동 FC서울 감독, 김학범 제주 유나이티드 감독 등 대표팀 지도 경험이 있거나 전술적인 역량을 인정받은 사령탑들이 거론된다. 당장 다음 달 태국과 2026 국제축구연맹(FIFA) 북중미 월드컵 예선을 치러야 하고, 대표팀 내분설도 수습해야 하니 가까운 국내 감독들부터 언급하는 모양새다.
2024시즌 K리그는 당장 다음 주인 내달 1일 개막한다는 점이다. 새롭게 팀을 맡은 김기동 감독과 김학범 감독은 아직 데뷔전조차 치르지 못한 상황에서 대표팀 감독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상식과 존중이 실종된 결과다. 적어도 K리그와 구단들에 대한 존중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리고 시스템이 정상적인 상태라면 후보 선정 단계에서 먼저 거론되기 어렵다. K리그 개막을 앞둔 각 구단과 팬들은 불쾌한 반응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K리그 감독을 당장 대표팀 사령탑에 선임하기도 쉽지는 않다. KFA 축구국가대표팀 운영규정 제12조(감독·코치 등의 선임) 2항엔 ‘구단에 속해 있을 경우 당해 구단의 장에게 이를 통보하고, 소속 구단의 장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이에 응하여야 한다’고 적혀 있으나, 이를 강제성이 있는 규정으로 해석하는 K리그 관계자들은 없다. 감독이 구단과 팬들을 저버리고 대표팀 감독을 택하지 않는 한, 규정에 명시된 특별한 사유 안에 구단과 감독의 계약이나 팀 상황 등이 포함될 수 있다는 게 관계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가뜩이나 클린스만의 실패 사례 탓에 차기 감독은 누가 선임되느냐 만큼이나 ‘어떻게’ 선임됐느냐에도 많은 관심과 비판이 쏟아질 전망이다. KFA 전력강화위가 ‘원점’에서 출발해야 하는 이유다. 축구계 한 관계자는 “개막을 앞둔 K리그 감독들이 거론되는 것만으로도 K리그에 대한 KFA의 인식을 알 수 있다. 구단과 감독 모두 당혹스러울 것”이라며 “대표팀 새 감독 선임은 납득할 만한 기준을 세우고 투명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아주 당연한 절차인데 KFA는 그걸 못 했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