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주행 중인 차가 보행자를 들이받는 사고가 잇따르면서 시민들의 불안이 커지고 있다. 가해자들이 모두 '급발진'을 주장하고 있는 가운데, 교통사고 후 ‘급발진이 발생했다’고 신고하는 운전자가 매년 수십 명꼴인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지금까지 자동차 제조사가 급발진을 인정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다. 법원 판결도 마찬가지다. 일부에서는 급발진이 차량의 기계적, 전기·전자적 결함인지를 규명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고, 이런 점이 오히려 급발진 신고를 남발하게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너도나도 급발진 주장
9일 보험 업계에 따르면 이달 주요 도심에서 일어난 교통사고는 크게 지난 1일 일어난 서울 시청역 역주행 참사, 3일 국립중앙의료원 응급실 택시 돌진, 이날 수원 화서사거리 5중 추돌이 있다. 이 사고 운전자들에게는 공통분모가 있다. 모두 '급발진 사고'를 경찰에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청역 역주행 참사의 가해자 A 씨는 경찰 수사에서 “브레이크가 딱딱했다”며 급발진을 주장했고, 국립중앙의료원 응급실 돌진 사고의 가해자 B 씨도 급발진을 주장했다. B 씨는 마약 간이 시약 검사 결과에서 모르핀 양성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수원역에서 사고를 낸 C 씨도 경찰 조사에서 "차량이 급발진했다"는 취지로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신고 사례들에 대해 “급발진 가능성을 100% 배제하긴 어렵다”면서도 “여러 정황으로 봤을 때 급발진이 아닐 가능성이 큰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급발진의 뜻이 급할 때 막 지르는 단어로 전락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무분별한 급발진 주장으로 인해 사고 처리나 피해 보상이 지연되는 등의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검증 가능한 장치를 완성차에 탑재하는 등의 방안이 필요하다는 제언도 나왔다.
급발진 의심 1년에 30여건, 인정은 0건
급발진은 운전자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차가 갑자기 빠르게 가속하는 현상을 말한다. 이 현상이 발생하면 엔진회전수(RPM)가 급격히 상승하고 차량은 빠른 속도로 돌진한다. 전문가들은 급발진 현상이 ECU(전자제어장치)의 오류로 인해 발생하거나 잦은 브레이크 사용을 원인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국내에서 급발진으로 확인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다. 윤종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한국교통안전공단으로 받은 자료에서도 2017년부터 올해까지 연평균 30건의 급발진 신고가 들어왔지만 결함 인정은 한 건도 없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도 급발진 사고로 의뢰받은 사건들 중 엔진 출력 이상 급등과 같은 급발진 인정 사례는 없었다.
해외 역시 마찬가지다. 대부분 급발진을 ‘운전자의 오조작 및 착각’으로 인해 발생하는 사건으로 결론 내렸다.
'자동차 왕국' 미국도 교통부 도로교통안전청 주도로 급발진 사고로 추정됐던 수천 건을 조사했지만 대부분 원인을 밝히지 못했다.
다만 미국의 경우 단 1건 유의미한 사례가 있기는 하다. 토요타가 급발진을 일으켰을 때 2012년도에 의회가 나사에 원인 조사를 의뢰를 했다가 실패했는데, 민간 소프트웨어 업체가 30초 동안 급발진 재현에 성공을 했다. 이를 법원이 인정했고, 토요타는 미국의 법무부하고 합의해서 1조2800억원 정도 벌금을 합의했다. 어쨌든 30초 동안 의도하지 않은 가속을 재현한 것 자체가 성공을 했기 때문에 그 자체가 증거로써 인정된 것이다.
그런데도 토요타는 "우리는 소비자를 위해서 보상을 하게 한 것이지 급발진 자체를 인정한 건 아니다"고 항변을 한 바 있다.
페달 블랙박스 주목
급발진 사고가 잇따르고 규명이 쉽지 않은 가운데 일부에서는 제도적으로 페달 블랙박스 설치를 의무화하면 책임 소재를 확실히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제안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페달 블랙박스가 있다면 급발진·오조작 여부를 힘겹게 따져볼 필요가 없다"고 설명했다.
급기야 일부 시민은 자체적으로 페달 블랙박스를 설치하는 등 대처에 나서고 있다. 한 온라인 판매 사이트에서는 페달 블랙박스 상품이 주간 인기상품 1·2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이헌승 국민의힘 의원은 '페달 블랙박스 설치 의무화' 내용을 담은 자동차관리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