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복싱 역사가 2024 파리 올림픽에서 새로 쓰였다. 12년 만의 올림픽 메달 확보뿐만 아니라 여자 선수로는 최초의 메달리스트가 탄생한 것이다. 주인공인 임애지(25·화순군청)는 “12년 만의 메달보다는 여자 최초의 메달이 더 의미가 있는 것 같다”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임애지는 2일(한국시간) 프랑스 파리의 노스 파리 아레나에서 열린 2024 파리 올림픽 복싱 여자 54㎏급 8강전에서 콜롬비아의 예니 마르셀로 아리아스 카스타네다를 3-2(30-27, 30-27, 28-29, 29-28, 28-29) 판정승을 거두고 준결승에 진출했다.
올림픽 복싱 종목은 동메달 결정전이 따로 없고 준결승에서 탈락한 두 선수가 모두 동메달을 목에 건다. ‘최소 동메달’을 확보한 것이다.
임애지가 동메달을 확보하면서 한국 복싱은 지난 2012 런던 올림픽 한순철 은메달 이후 12년 만에 올림픽에서 메달을 확보하게 됐다. 지난 2016 리우 올림픽과 2020 도쿄 올림픽에서는 모두 ‘노메달’에 그쳤지만, 그 흐름을 임애지가 12년 만에 깨트렸다.
한국 여자 복싱 선수로는 처음으로 올림픽 메달을 목에 건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도쿄 올림픽 당시 임애지를 비롯해 그동안 올림픽 복싱 무대에 올랐던 여자 선수들은 누구도 오르지 못했던 시상대를 임애지가 처음으로 서게 됐다.
경기 직후 취재진과 만난 임애지는 3분 3라운드 동안 카스타네다와 치열한 난타전을 벌인 선수가 맞나 싶을 정도로 더없이 밝았다. 올림픽 오륜기 안경까지 착용하고 사진 포즈부터 취하는 모습이었다.
임애지는 “우리나라 복싱 발전에 도움이 된 거 같아 행복하다”며 환하게 웃은 뒤 “사실은 너무 무서웠다. 그래서 긴장도 더 했던거 같은데, 올라가서는 차라리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던 거 같다. 이렇게 늦게 시작한 건 처음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날 경기는 현지시간으로 1일 오후 9시가 넘어서야 시작됐다. 그는 “이렇게까지 늦게 경기를 한 건 저도 처음이다. 기다리는 게 너무 지루했다”고 했다.
‘무서웠다’는 표현의 배경엔 상대의 저돌적인 스타일이 있었다. 임애지는 “상대가 생각보다 덜 달라붙었다. 전략들이 많았는데 그래서 그냥 내가 더 집중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경기에 임했다”며 “(스텝을 통해) 엇박으로 하는 게 저는 정말 즐거웠다. 내 페이스대로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조금 더 하게 되는 거 같다”고 웃어 보였다.
임애지는 “아쉬웠던 부분이 있다면 조금 더 정확하게 쳤다면 어땠을까라는 것이다. 그래서 승리를 끝까지 확신하지는 못했다. 내가 이겼다는 마음은 없었던 거 같다”며 “2라운드때 확실히 제대로 하지 않았다. 3라운드까지 집중해야 되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더 집중해야 될까 힘들긴 했지만 집중하려고 노력했던 경기였다”고 덧붙였다.
여자 복싱 최초의 메달과 한국 복싱 12년 만의 메달 중에서는 ‘최초’에 더 의미를 뒀다. 임애지는 “유스 때 여자 복싱 최초로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을 땄다. 그때 최초라는 말을 처음 들어서 되게 뜻깊었다. 저희 첫 시합이기도 했다. 이번에도 저한테는 최초 메달리스트라는 말이 더 의미가 있는 것 같다”고 웃어 보였다.
지난 2020 도쿄 올림픽에서의 아쉬움을 털었다는 데에서도 의미가 컸다. 당시 임애지는 첫 경기에서 져 일찌감치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임애지는 “탈락 이후 파리 올림픽 3년 남았다는 말에 힘이 쫙 빠졌던 기억이 난다. 그때 정말 못하고 져서 그만두고 싶었기 때문”이라면서도 “(도쿄 올림픽 이후) 기술적으로는 다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 마음가짐이 가장 달라졌다고 본다. 성적을 내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면, 파리를 준비하면서는 즐기고 싶다는 말을 되게 많이 했다”고 설명했다.
동메달을 확보했지만 아직 도전이 끝난 건 아니다. 임애지는 “코치님들이 (8강전을 앞두고) 1승만 더하면 메달이라고 하셨다. 저는 ‘세 번 다 이길거다’라고 말했다. 그 마음가짐을 선생님들이 좋게 봐주셨다. 지금도 결승까지 생각하고 있다”고 다부지게 말했다.
이날 임애지는 저돌적으로 덤벼드는 상대에 맞서 풋워크로 대응해 견제했다. 정확한 타이밍으로 카운터 펀치를 적중시키면서 1라운드 판정에서 3-2로 근소한 우위를 점했다. 2라운드 이후에도 상대의 공격에 임애지가 침착하게 맞서면서 우위를 이어갔다.
마지막 3라운드에선 궁지에 몰린 상대가 더욱 저돌적으로 나섰으나, 임애지는 흔들리지 않고 상대 공격을 모두 흘렸다. 독일과 미국 심판은 1~3라운드 모두 10-9로 임애지의 손을 들어줬다. 반대로 1~2라운드 카스타네다에게 점수를 줬던 카자흐스탄과 알제리 심판은 3라운드만큼은 임애지에게 마음을 돌렸다. 결과는 임애지의 3-2 판정승, 그리고 한국 복싱 새 역사였다.